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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현 May 21. 2021

사색을 놓치지 않는 법

현충원 외곽길

공부만 잘하는 바보. 어렸을 때 몇몇 아이들이 나를 이렇게 불렀다. 10대의 나는 ‘바보’ 보다는 ‘공부’, ‘잘하는’이란 단어에 더 비중을 두었기 때문에 이 말이 마냥 칭찬이라 생각했다. 책만 많이 보는 바보. 20대의 어느 날, 누군가가 나를 이렇게 불렀다.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여전히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란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떠올려보면 나는 내 주관을 확실히 하는 것보다 뛰어난 누군가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을 좋아했다. 미래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기보다 ‘20대나 30대 때 반드시 해야 하는 것’, ‘N년 후 미래’ 같은 책을 읽었다. 이별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극복하기보단, 이별을 극복하는 데 가이드가 될 만한 책을 찾아 읽었다. 책은 많이 읽었지만, 스스로 생각할 줄은 몰랐다. 책상머리 바보가 맞았나 보다.


공부나 독서는 다른 사람이 알아낸 지식이나 생각을 받아들이는 행위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의견을 정리하는 일과 같다. 책을 읽는다는 건 스스로 사색하고 판단하기보다는 다른 이의 의견을 내 의견으로 대치하려는 의도가 조금은 있다고 생각한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늘 책을 집어 들곤 하는데, 이게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사색을 미루고, 잘 정리된 다른 이의 의견을 내 머릿속에 입히고 싶었던 거다. 적어도 내 경우엔.


이런 일을 피하려고 내가 찾아낸 것이 숲길이다. 책이나 휴대폰을 손에서 내려놔야 했다. 집에 있을 때나 일하러 갔을 때, 친구를 만나러 갈 때나 새로운 미팅을 하게 됐을 때. 나는 늘 근처에 있는 숲길을 찾아 걷는다. 다른 사람의 생각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 혼자만의 힘으로 사색하기 위해.


서울에 가는 날엔 늘 도심에 있는 숲길을 찾아 잠깐씩 걷고 온다. 그중 가장 자주 들르는 곳은 현충원 외곽 숲길. 강남에 가든, 종로에 가든 늘 이곳을 (굳이) 거쳐 갈 수 있어서 서울 나들이를 하는 날엔 익숙하게 종종 걷고 온다. 4호선 동작역에서 출발해 천천히 안전하게 걸으며 1시간 30분 정도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길은 담장을 따라 걷는 것으로 시작한다. 맑은 날에는 밝고 고운 빛에 출렁이는 숲의 그림자를 즐기며 걸을 수 있다. 흐린 날엔 바닥까지 깊게 내려앉은 소음을 멀리 떨어뜨리며 걸을 수 있고. 자주 들른 덕에 현충원 외곽길 곳곳엔 생각의 흔적이 묻어있다. 숲 여기저기 남겨둔 나만의 생각거리를 다시 발견하며 자유롭게 뻗어 나가는 정신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숲 풍경을 즐기다 보면 온전히 생각에 몰두하기는 힘들다. 사색하다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 생각이 뚝, 끊기기도 한다. 뭐 그러면 어떤가. 계속 걸을 수만 있다면 끊어진 사색은 필연적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현충원 길은 다채롭게 구성되어 있다. 흙길, 계단길, 데크길, 통나무길 등. 계속해서 다른 길이 나타나기 때문에 걷는데 지루하지 않다. 또 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데크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걷는 도중에 쉬기에도 좋고 가벼운 소풍을 즐기기에도 좋다. 서달산 정상에 오르면 서울 서쪽이 한눈에 들어온다. 구로, 개봉 일대의 풍경. 저 멀리 내가 사는 부천의 모습도 보일 듯 말 듯.


일상에 너무 집중해서 살다 보면 가끔 생각하는 법을 잊어버릴 때가 있다. 1분이라도 빨리 준비해서 출근하고, 1분이라도 빨리 잠자리에 들어야 하고, 잠깐 시간이 날 때는 머리를 쉬게 하려고 영상이나 텍스트를 보고 읽는다. 오로지 나 혼자만의 힘으로 생각하고 온전히 나만의 의견을 만들어 내기 위해선 아무런 자극이 없는 편안한 상태에 머물 필요가 있다. 바쁜 일상 중에도 반드시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권위가 아니라 나 자신을 좀 더 믿고 살아가기 위해서. 그런 시간을 위해 나는 종종 새로운 숲길을 찾는다. 새로운 생각거리를 안겨준 오늘의 숲길에 감사하며, 다음의 숲길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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