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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현 May 19. 2021

겨울의 한 가운데서 찾은 온기

서울식물원

나는 종종 가지지 못한 것을 그리워한다. 상실과 부재에 대한 그리움. 그건 비단 사람이나 물건에만 해당되지는 않는다. 계절에 관해서도 늘 비슷하게 그리워하며 사는데, 대표적으로 여름에 겨울을 기다리고 겨울에 여름을 기다리며 산다. 더위나 추위는 잘 견딘다. 그저 반대의 풍경을 그리워 할 뿐. 여름엔 설경을 기대하고, 겨울엔 지독한 신록을 기대한다. 남편 말대로 내가 반골이라 그런가. 현재 계절은 뒷전이고 지나갔거나 다가올 계절을 생각하며 살고 있다.   

   

2020년 겨울은 유난히 길었다. 유독 추운 날에 바삐 출퇴근 하느라, 눈이 펑펑 쌓인 날에 일터를 오가느라, 추운 사무실에서 벌벌 떨며 일하느라. 이래저래 욕도 먹고, 무시도 당하느라. 심지어 코로나 때문에 어디 가볼 데도 마땅치 않고 오로지 집과 회사만 오가느라 생활이 꽤 메말랐다. 오가는 길에 만난 앙상한 나뭇가지가 지루하고 싫었다.      


힘겨운 겨울의 끝자락에 방문한 서울식물원은 내게 여름을 가져다주었다. 식물원에 마련된 열대관은 겨울에 만날 수 있는 여름 천국이었다. 따뜻했고, 촉촉했다. 포근하고, 평화로웠다. 야외에선 볼 수 없었던 푸르름이 온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메마른 겨울 가지 속을 헤집고 다니다가 이토록 넘치는 생명의 증거를 만나니 반가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래, 겨울에 따뜻한 숲의 기운을 느끼고 싶다면 식물원을 찾으면 된다.      


지중해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더니, 예쁜 정원에 들어선 듯 했다. 산책길을 따라 늘어선 꽃, 야자나무, 그리고 올리브 나무. 우울한 회색빛 태양과 시커먼 구름을 극복하기에 딱 좋았다. 반짝이는 은색과 녹색의 잎. 잊혀가던 계절과 날씨를 내 눈에, 피부에 전해준 따뜻한 풍경이었다. 온실 곳곳엔 식물을 돌보는 직원분들이 계셨는데, 어찌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나도 이런 데서 일하면 좋겠다, 식물이 마시는 공기를 마시고 풀이 좋아하는 습도에 내 몸을 맞춰서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온실에서만 몇 바퀴를 돌다 나와선 금세 식물도감 책 하나를 주문했다. 기념품 가게에 있던 식물원 가이드북과 식물 관리에 관한 책도 가방에 담았다. 푸르른 식물원의 기운을 가방에 가득 담고 싶었나보다. 식물원 산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는데도 온실의 따뜻하고 습한 공기가 여전히 내 몸에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4월은 되어야 식물의 푸른 기운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6월은 되어야 그 짙푸른 기운에 풍덩 빠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잊고 살았는데, 1년 내내 그 계절의 공기를 전해주는 식물원이 근처에 있었다. 겨울에 여름을 찾는 건 조금 변태 같은 일인가? 그래도 상관없다. 따뜻한 공기, 촉촉한 습기, 진한 초록의 냄새와 색채가 너무 그리웠다. 야외로 나오니 또다시 겨울 식물이 사방에 펼쳐져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모습이 영 싫지만은 않다. 지구가 몇 바퀴 더 돌고 나면 야외에서도 따뜻한 식물의 향을 맡을 수 있을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다가올 그 풍경들. 이제는 그걸 기다릴 수 있는 힘이 자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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