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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현 Apr 28. 2021

우리에겐 _산이 있어서 괜찮아요

서울 서대문구 안산 자락길

“우리에겐 안산이 있으니까, 괜찮아요.”

그는 60세가 넘은 서울 서대문구 시민기자였다. 여름에 취재 때문에 돌아다니는 게 힘들지 않으시냐 물었더니, 안산 얘기를 하셨다. 그날 나는, 서대문구청 어딘가의 강의실에서 시민기자를 대상으로 기사 작성법에 관한 강의를 진행했다. 30대 중반의 글력도 짧은 내가 뭘 안다고, 딱 봐도 나보다 2배 내외로 살아오신 분들을 대상으로 앞에서 떠들려고 하니 조금 민망했던 그런 강의였다.      


산이 있으니 괜찮다, 그 말은 순간적으로 내 강의를 멈추게 했다. 산이 있어서 괜찮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이지? 근처에 산이 있어서 ‘좋다’, 예쁜 숲길이 있어서 ‘좋다’는 표현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런데 산이나 숲이 있어서 괜찮아요, 라는 얘기엔 묻고 싶어지는 것들이 따라붙는다. 산이 있어서 뭐가 어떻게 괜찮다는 말인가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좀 더 자세히 말해주세요!라고 하고 싶었지만, 이날은 인터뷰어가 아닌 강사였기 때문에 질문을 삼켰다. 

  

우리에게 숲이 있으니 괜찮다는 말은 뉴질랜드 사람들이나 하는 말인 줄 알았다. 뛰어난 풍광을 가진 산맥, 피오르드를 낀 우림. 혹은 가벼운 배낭을 하나 메고 금세 찾아 들어갈 수 있는 울창하고 깊은 풍경. 새가 지저귀고 에메랄드빛 호수 옆으로 작고 예쁜 길이 나 있는 그런 숲. 그런 숲을 풍경으로 두고 사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라 생각했다. 어딜 둘러보나 아파트와 빌딩밖에 없는 한국의 도시에 사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안산에 있는 것은 아닐까, 궁금했다.     


2시간여 강의를 마무리하고, 나는 서대문구청을 나섰다. 구두 때문에 잠깐 망설였지만, 굽이 낮으니 괜찮겠지. 여기까지 온 김에 안산에 가보기로 했다. 숲길 입구부터 소나무가 빽빽했다. 나무는 언제 봐도 그 나무가 그 나무 같지만, 그나마 알아볼 수 있는 소나무와 참나무 자작나무. 안산 자락길엔 이 나무들이 울창하게 어울려 하늘을 가릴 정도로 높게 자라 있었다. 걷는 길도 편안했다. 잘 정리된 흙길과 데크길 위주로 걸을 수 있었다. 단화로도 충분히 걸을 만했다. 더운 여름인데도 숲길을 찾은 시민들이 꽤 있었다. 유모차나 휠체어의 모습도 드문드문 보였다.     

 

숲에 들어가면 아무래도 아늑한 기분이 든다. 보호받고, 정화되는 그런 기분. 아무래도 그런 기분을 느끼려면 숲의 규모도 중요할 테다. 아기나무가 가득한 숲보다는 오랜 시간 그곳을 지키고 있는 나무, 그것도 군락을 이루고 있어야 아늑한 기분을 느끼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런 환경 속에 살아가는 저 어딘가 먼 나라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숲이 있어서 늘 괜찮을’ 거다.   

  

안산에도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장소가 여럿 있다. 산책 중 만난 잣나무 숲과 메타세쿼이아 숲. 쉼터에 앉아 하늘을 향해 뻗은 숲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흘린 땀만큼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이곳은 서울에서도 유명한 삼림욕 명소다. 가평이나 강원도까지 가지 않아도, 도심에 이런 높고 깊은 숲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이런 풍경, 갑자기 왔는데도 이렇게 편안하게 누려도 되는 풍경인 걸까.      


안산이 있어서 괜찮다는 말은, 이곳에는 사람을 평화롭게 만들 수 있는 깊고 울창한 '숲이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1시간이든 3시간이든 내가 원하는 만큼 안전하게 걸으며 숲을 누릴 수 있는 곳. 싱그러운 나무 터널 속에 있는 사람을 숲의 보호색으로 조용히 안아주는 그런 곳.      


‘기사글 쓰는 법’ 강의가 시민기자들에게 뭔가를 남겼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날 내게는 뭔가 남았다. 곁에 있는 숲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아는 사람들, 그 숲을 소중히 여기던 마음을 만난 날. 그간 나는 숲을 그저 걷는 곳, 운동하는 곳처럼 여기진 않았는지. 숲이 가진 힘을 너무 과소평가하며 살진 않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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