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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현 May 24. 2021

숲에 못 가는 마음 달래기

메마른 가지를 보는 것도 힘들었던, 쩍쩍 갈라진 기분이었던 지난겨울. 그 겨울엔 따뜻한 바람결에 살랑이는 풍성한 나뭇가지를 간절히 기다렸다. 세상의 온갖 초록을 다 가졌을 푹 익은 봄날의 숲. 봄이 오기만 해 봐라, 생의 마지막 숲을 방문하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숲에 발을 딛겠다 생각했다. 노트북 메인 화면엔 빼곡하게 정리된 '가야 할 숲' 엑셀 파일이 매일 내 맘을 설레게 했다. 멀리 있는 정원엔 수목원엔 산엔, 어떤 일정으로 가면 좋을지 미리 계획해 둔 노트가 늘 내 가슴을 뛰게 했다. 


오매불망 기다렸던 봄이 왔는데 이번 봄에는 어딜 가보질 못했다. 3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 매일 출근해야 했다. 내가 보는 숲이라곤, 회사 창문의 커튼 사이로 슬쩍 보이는 오래된 아파트 단지의 나무 몇 그루가 다였다. 3월엔 조금씩 연둣빛 가지로 변하더니 5월 말인 지금은 꽤 풍성한 스타일을 자랑하고 있다. 숲에 가지 못해 못내 아쉽고 그립지만 나름대로 방법을 찾아 그 마음을 달래고 있다. 


걸을 땐 천천히 걷기. 나무 밑을 지날 땐 고개를 들어 나뭇가지와 잎과 하늘이 어우러지는 풍경을 감상한다. 휴대폰 카메라에 담아도 보고 나무 아래 벤치에 잠깐 앉아도 본다. 울창한 숲은 아니지만 도시의 오래된 나무는 그 자리의 오래된 사연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다. 



바람에 휘청이는 나무를 볼 땐, 잠깐 멍 때리며 바라보기. 상하좌우로 마구 흔들리는 나무를 보면 각종 잡념도 이리저리 휘청이며 다 떨어져 나가는 것 같다. 툭, 툭 생각을 떨어뜨리며 주유소 인형마냥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보면 가슴이 꽤 시원해진다. 


나무와 식물, 산에 관한 책 읽기. 요즘 산 책을 보면 온통 식물 책이다. 무슨 식물도감, 무슨 식물학, 걷는 것에 관한 책, 무슨 정원이 어쩌고 저쩌고... 다리로 걷지 못하니 머리로 그 초록을 헤집고 있다. 그동안 숲길을 걸으며 '좋다, 좋다'만 연발했다면 이번엔 그게 왜 좋았는지, 내가 지나친 식물이 무엇이었는지, 그건 어떻게 삶을 이어가고 있는지를 공부하고 있다. 


각종 SNS로 대리 만족하기. 가보지 못한 숲, 산. 그곳에서 찍을 수 있는 가장 좋은 풍경을 아낌없이 올려주는 사람들의 사진을 보면 부러우면서도 공짜로 좋은 곳에 다녀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다리 통증 없이 해발 1000m 산에 올라가고, 더위와 모기의 습격을 당하지 않고도 울창한 원시림에 들어갈 수 있다. 인스타그램을 놓을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산스타그램'이다. 


지금 잠깐 여유를 보내고 나면 또다시 주 7일 근무가 시작된다. 아마 초여름이 되면 또다시 창문 밖 아파트 단지의 나무로 만족해야 하는 시간이 오겠지. 편의점 앞 나무 몇 그루에 만족해야 하고 하루 종일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감탄만 하는 그런 날이 온다. 하늘을 잔뜩 가린 울창한 전나무 숲에는 가기 힘들 거다. 이름도 거창한 저 멀리에 있는 거대한 식물원에도 가기 힘들 거다. 너무 좋아하는 거대한 온실을 구경하러 가기도 힘들 거고. 아쉽고, (주 7일 근무에) 조금 화도 나지만 한 계절만 조금 더 버텨보자. 그 겨울을 꾹꾹 참고 지냈으니 이 봄도 한 번 참아보자. 설이 지나면 추석이 오고, 추석이 지나면 설이 오듯 아쉬운 이 봄이 지나면 제일 좋아하는 내 여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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