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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성국 Nov 19. 2021

승부욕의 뿌리

    영신이(가명)는 취미로 당구를 즐긴다. 당구 경기를 하다 보면 어느 날에는 큰 점수 차이로 이기고 있을 때가 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영신이는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느낀다. 즐기기 위해 취미로 하는 것임에도 크게 지고 있는 사람은 더는 즐기지 못한다. 자신도 모르게 표정이 썩어가고 알게 모르게 신경전이 격해진다.


    영신이는 타인이 어떤 기분일지 예민하게 느낀다. 모두가 즐거웠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아주 미묘하게 긴장을 풀어서 상대에게 점수를 내주고, 점수 차를 좁힌다. 분위기가 좋아지고 다시 웃음꽃이 와락 피어난다. 물론 즐기더라도 이기고 싶은 마음도 있으니 점수가 역전되기 전에 다시 긴장의 끈을 조인다. 상대방이 알아채서 모욕감을 느끼지 않게끔 자연스럽게 조절한다.


    문제는 점수차를 좁히다가 역전이 되어 패배하는 경우다. 이런 경우 상대는 본인의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이겼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상대가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다양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물론 영신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상대는 모르기 때문에, 상대는 실력만으로 이겼다고 믿을 수 있다.


    영신은 승리도 중요하지만 타인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도 승리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여긴다. 영신이의 이런 사고방식을 혐오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승리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이다. 영신이의 행동이 승리의 가치를 훼손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오로지 승리만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전제할수록 승리를 칭송하는 것이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타인의 마음을 배려하는 것보다 승리가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게임에서 큰 점수 차로 이기고 있더라도 가차 없이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그것이 상대에 대한 배려라고 여긴다. 많은 사람이 이런 사고방식을 친숙하게 여길 텐데, 현대에는 시장주의를 내면화하고 있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시장주의는 가치에 가격을 매겨서 경쟁하게 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다.




    시장주의는 때때로 실패하는데, 가격을 책정할 수 없는 가치도 있고 가격으로 책정하면 훼손되기에 책정하면 안 되는 가치도 있기 때문이다. 수요가 높은 재화나 서비스를 시장주의에 편입시키면 생산성이 향상된다. 그러나 생산성 향상에만 치중한 나머지 진정 중요한 것을 놓치기도 한다. 시장주의에 모든 가치를 편입시키면 때로 심각한 문제(목적을 잊는다)가 발생하므로 우리는 어떤 가치에 시장주의를 채택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휴대폰은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는 도구이기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에게 필수품이 되었다. 따라서 더 좋은 품질의 휴대폰을 더 적은 비용으로 생산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니 휴대폰은 가격을 매겨서 시장에서 경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회사는 휴대폰의 생산성 향상에 너무나도 집중한 나머지, 사람의 죽음을 방관하며 휴대폰을 생산했다. 휴대폰 공장의 생산성 향상과 관련된 환경은 개선했지만 노동자의 건강과 관련된 환경에 많은 비용을 들이진 않았다. 그로 인해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죽어갔다.


    노동자의 건강을 신경 쓰지 않고 휴대폰을 생산하면 100억의 추가 이익을 올릴 수 있다고 하자. 이때 노동자의 생명을 시장주의에 편입시켜 목숨 하나당 10억 원이라고 가격을 매겨서 10억 원을 유족에게 보상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유족은 10억에 합의한다고 가정하자. 이때 회사는 여전히 90억의 이익 효과가 있다. 계산상 이익이기 때문에 회사의 의사결정은 정당했던 것인가? 회사는 영리 목적이니까?


    사람의 생명을 돈과 교환 가능한 시장주의에 편입시키게 되면 이런 논리가 정당화된다. 목숨 값을 10억으로 계산한 건 값을 너무 적게 쳐줘서 문제인 것인가? 100억이면 어떨까? 위 사례가 혐오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사람의 목숨 값을 10억으로 매긴 게 너무 적어서 그런 게 아니다. 그건 사람의 목숨을 돈으로 계산했기 때문이다. 금전적으로 이익이 되더라도 사람을 죽여서 휴대폰을 생산하는 건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아닌가? 휴대폰은 사람의 좋은 삶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사람을 소모하며 휴대폰을 생산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짧은 시간 동안 유례없는 자본주의적 성공을 이뤄냈다. 현재 한국인의 대부분은 태어날 때부터 자본주의의 성공에 대해 지겹게 듣고 자라온 사람일 것이다. 자본주의는 시장주의를 긍정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시장주의가 의심해봐야 할 만한 방식인지 생각하기 어려워하는 듯하다. 시장주의가 의심의 여지없는 보편적 진리라 여겨서 어떤 가치든 시장주의를 채택해야 한다는 쉬운 방법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 우려된다.




    게임에서 승리하는 것도 중요하고, 타인의 마음을 신경 써서 배려하는 것도 중요하다. 요점은 둘 중에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냐는 것이다. 물론 타인이 나와 어느 정도 유대감을 형성한 사람인지에 따라, 어떤 게임에 참가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정도가 달라지겠지만, 사람마다 같은 상황에도 어느 것에 더 가중치를 두느냐는 다른 것 같다. 그리고 시장주의에 대한 의심을 하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승리만이 궁극의 목적인 것처럼 여기는 것 같다.


    승리를 궁극의 목적으로 여기는 사람은 누군가 상처를 받든 말든 승리자를 칭송하는 것이 공정하다 여길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상처 받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승리자를 칭송하는 것만이 공정하다고 여기지는 못할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일률적인 공정의 잣대는 있을 수 없는 것 같다. 속한 공동체의 가치관에 따라 다른 합의가 이뤄질 수도 있고 그 공동체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의 답을 정해서 딱 잘라 재단할 수 있는 건 아닐지라도, 각각의 상황에서 기준을 판단할 때, 우리 사회는 너무 승리에 치우친 판단을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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