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무무당無無堂이 있었던 경북 군위의 인각사
없을 ‘무’ 자 두 개를 겹쳐 쓰면 ‘없고 없다’는 뜻도 되지만 ‘없는 게 없다’는 뜻도 된다. 어느 것일까? 나는 이것이 항시 의문이었기에 돌아가신 전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께 여쭤보니 이렇게 답하셨다. “없고 없는 것이 없는 게 없는 겁니다.”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 산사순례』, 창비
욕망을 충족할 수단을 선택할 순 있지만 욕망을 선택할 수는 없다. 우리가 보통 주관적으로 뭔가를 선택한다고 느끼는 것은 사실 선택하는 게 아니라 욕망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다. 배고프다는 느낌이 들면 그 느낌에 따라 밥을 먹기로 한다. 다른 할 일이 있어서 배고파도 밥을 먹지 않고 할 일을 우선 마치기로 한다면, 그 할 일을 해야 한다는 욕망이 더 강해서 그 욕망에 따른 것이지 선택한 것은 없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욕망에 종속되는 존재가 아니라며, 자신은 욕망에 반하는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반박할 수 있다. 배고파도 굶기를 선택할 수 있고, 단식하다 죽음에 이르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 경우에도 다른 욕망이 더 강해서 그 욕망에 종속된 것이지 선택한 게 아니다. 동물과 다른 존재임을 증명하고자 하는 욕망, 욕망과 무관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자 하는 욕망, 단식을 통해 어떤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욕망이 먹고자 하는 욕망보다 강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무언가를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욕망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욕망을 선택할 수는 없다. 당신은 원하지 않는 것을 원할 수 있는가? 예를 들면, 당신은 동성에게 성욕을 느낄 수 있는가? 이성에게 성욕을 느낄지 동성에게 성욕을 느낄지는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동성애자가 마치 잘못된 선택을 했고 그 잘못된 선택에 대한 징벌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동성애자에게 ‘이성에게 성욕을 느껴보라’ 하는 것은 이성애자에게 ‘동성에게 성욕을 느껴보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인간 개체가 현재 무엇을 욕망하는지는 개체의 유전자와 현재까지 살아온 경험의 총체로 규정되는 듯하다. 그런데 인간은 둘 중 어느 것도 선택할 수가 없다.
유전자를 선택하여 태어날 수 없다는 건 자명하다. 살아온 경험의 총체를 선택할 수 없다는 건 과거를 수정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현재 나의 욕망은 이미 결정되어있다. 시간 여행이 가능하지 않은 한 현재 욕망을 수정하기 위해 과거 삶의 경험을 수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현재의 욕망을 결정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삶의 경험을 선택해왔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미래의 나의 욕망을 결정하기 위해 현재부터의 삶의 경험을 선택할 수는 있을까? 설령 미래의 나의 욕망을 결정하기 위해 현재부터의 삶의 경험을 선택했다고 해도, 미래의 나의 욕망을 선택하기까지의 경위가 있을 것이다. 그 경위는 현재의 나의 욕망에 종속된다. 즉, ‘20년 뒤에는 피아노 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결심하고 피아노 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되기 위한 삶의 경험들을 20년 동안 선택한다고 해도, 현재의 내가 20년 뒤에 피아노 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것은 현재의 나의 욕망에 따른 것이다. 결국 그 미래의 욕망을 선택한 것도 현재의 나의 욕망을 충족할 수단을 선택한 것이지 욕망의 근원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이 논리를 과거로 확장하면 결국 '나'의 최초의 선택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먼저, 그때의 경험을 현재의 내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동일시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기억이 곧 나를 규정한다고 가정해보자.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선택이 지금의 나의 욕망을 결정했다고 해도 미래의 내가 뭘 욕망할지 결정하기 위한 일련의 삶의 과정을 설계할 지적 능력을 기억이 시작되는 시기의 내가 가졌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이런 과거로 확장되는 논리 사슬을 배제하더라도, 미래의 자신의 욕망을 필연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법칙이 발견되지 않았다. 20년 뒤에 피아노 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20년 동안 일련의 삶의 경험들을 선택해서 살아간다고 해도, 20년 뒤의 내가 필연적으로 피아노 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삶의 경험이 무엇인지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내가 미래의 욕망을 위해 선택한 경험들이 내 의도대로 미래의 욕망을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또한 확률적이며, 운에 기대고 있다.
만약 욕망을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원하는 걸 다 가질 수 있다. 나는 지관 스님의 '없고 없는 것'이란 모든 욕망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상태라고 해석했다. 욕망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면 욕망을 초월했기에 욕망을 선택할 수 있다. 욕망을 선택할 수 있으면 원하는 걸 다 가질 수 있다. 가지고 있는 걸 원하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없는 게 없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이다. 우리가 선택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도 마음이 지어내는 착각이다. 자유를 위해 욕망을 초월하라는 가르침은 그럴듯하다. 그러나 속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욕망을 초월할 수 없다. 우리는 욕망에 종속되어 욕망을 충족할 수단을 선택할 자유가 박탈되었다며 욕망을 충족할 자유를 얻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다. 욕망은 선택할 수 없기 때문에, 아마 속세의 인간들에겐 욕망을 선택할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는 당위는 귓등에 스쳐 비껴갈 것이다.
내 생각에는 특정 욕망에 종속되는 정도도 어떤 뇌을 가지고 태어났느냐에 따라 다른 것 같다. 인간의 감각에도 편차가 있다.** 어떤 사람은 특정 욕망에 더 강하게 끌릴 것이고 어떤 사람은 어떤 욕망에도 잘 끌리지 않을 수 있다. 어쩌면 해탈에 이르는 것은 수행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 누군가는 태생적으로 해탈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 참고: 사람은 다 다르다 - 보이지 않는 편차
어쨌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자유는 더 본질적인 자유, 즉 욕망을 선택할 자유가 아닐까. 어쩌면 유전공학이 자신의 욕망을 필연적으로 결정할 수 있게 해 줄지도 모른다. 이 경우에도 여전히 욕망의 근원을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미래의 나의 욕망을 현재의 내가 결정할 수 있다면 이제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무엇을 원해야 하는가이다. 어떤 사람이 욕망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는 동성애를 선택해야 하는가, 이성애를 선택해야 하는가, 둘 다 선택하지 않아야 하는가? 그걸 판단해야 하는 것이 다시 문제가 된다. 고민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