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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성국 Nov 25. 2021

무죄 판결을 내리는 판사

모든 현상에는 이면과 원인이 있다. 대개 여러 개의 원인들이 경합하며, 그것들이 화학적인 결합을 하여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현상에서 원인을 찾아내는 것은 인터넷 댓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원인을 찾아내는 능력이 아니라, 원인을 찾기 위해서는 무척 어려운 과학적 추론이 필요하며 자신은 그것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실패에 대한 인식이다. 원인을 찾아내는 것보다 자신이 틀릴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말은 정말 받아들이기 어렵고 대부분 사람을 무시한다는 반감만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죽었다.
- 김웅, 《검사내전》, 부키



    2021년 4월 25일 오전 2시 30분 반포 한강공원에서 친구와 술을 마시던 대학생 A가 실종됐다. 같이 술을 마시던 친구 B는 잠이 들었다가 4시 30분경 잠에서 깨어났는데 그때 이미 A는 사라진 상태였다고 진술했다. 4월 30일 A는 실종됐던 장소 근처 강 속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이후 친구 B에게 수상한 정황이 발견됐다. 본인의 휴대폰 대신 A의 휴대폰을 가지고 귀가했으며, 신발은 바로 버려버렸다. A의 아버지는 “B의 아버지가 0.5초 만에 ‘버렸다’더라. 보통은 ‘와서 확인하라’ 거나 ‘아내에게 물어보겠다’고 해야 하는데 즉답이 와서 의아했다”라고 말했다.


    친구가 사망했다면 애도를 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적극 협조하는 게 정상이다. 사람들은 누가 봐도 B가 A를 죽인 범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경찰은 누가 봐도 범인인 B를 구속하지 않았다. 이에 반발하는 사람이 많다. 누군가는 1995년 김성재 사망 사건을 언급하며, “26년 전에도 누가 봐도 범인이 명확한 사건을 경찰이 잡지 않았다. 저런 일은 옛날에나 있을 법한 일이라 여기기 쉽지만 2021년에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마치 26년이나 지금이나 발전이 없는 것처럼 말하지만, 누가 봐도 범인이 명확하다는 이유로 구속하는 것이야말로 전근대적이다.


김성재 사망 사건: 1995년 11월 20일, 인기 그룹 듀스의 멤버 김성재가 숙소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사건. 용의자로 지목된 여자 친구는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대법원 무죄 확정 판결을 받으면서 마약이냐 살인이냐에 대한 논란을 낳은 사건이 되었다.
출처: 나무위키 - 듀스 김성재 사망 사건

이날 재판부가 『형사재판의 증거는 엄격한 과학적 증명력이 필요 없으며 고도의 개연성만으로 충분하다』는 「유죄설」과 『법관으로 하여금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의 엄격한 증거 없이는 피고인을 범인으로 단정할 수 없다』는 「무죄설」을 예시한 것은 「신神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재판부의 고뇌를 간접적으로 토로한 것으로 풀이된다.
출처: 관련 기사(경향신문 1996.11.06)


    왜 판사들은 무죄 선고를 할까? 어떤 사건에 대해서 판사가 무죄 판결을 내렸다는 뉴스를 보면 대한민국 판사는 잘못됐다느니, 대한민국 법이 엉망이라느니 하는 반응을 보게 된다. 뻔히 죄가 있어 보이는 사람이 벌을 받지 않고 풀려나는 모습에 답답함을 느끼나 보다. 판사가 되려면 사법고시를 통과하든 로스쿨을 졸업하든 무척 똑똑하고 공부도 많이 해야 한다. 그런 인재들이 판사가 되고 나면 다들 멍청이가 되어서 우리 눈엔 명확히 보이는 범죄자를 판단할 능력을 상실하는 걸까.


    진실로 죄가 있는 사람과 진실로 죄가 없는 사람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어떤 존재(예컨대 신神)가 있어서 죄 있는 사람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죄가 없는 사람에게 무죄 판결을 내릴 수 있다면, 그 존재를 판사로 정하면 만사형통이겠다. 그러나 판사는 인간이고 따라서 판단에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위 관련기사 발췌의 '「신神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재판부의 고뇌'가 뜻하는 내용이다.




    법정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다는 것은 진실로 죄가 있다는 뜻이 아니며, 무죄 선고를 받았다고 해서 진실로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유죄 선고를 받았다는 것은 유죄 선고를 받을 절차를 충족했다는 의미이다. 무죄 선고는 절차를 충족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각 절차에 대한 판단을 판사가 하기 때문에 여전히 판사의 주관이 개입된다. 굶어 죽기 직전에 빵을 훔친 사람과 재미로 빵을 훔친 사람은 저지른 범법의 형식이 같다 해도 그 정당성은 다르기 때문에 정당성에 대한 판단을 판사가 해야 한다. 그러나 판사는 자신이 진실로 죄 있는 자와 진실로 죄 없는 자를 판단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인간의 판단은 언제나 실패할 수 있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따라서 자신의 느낌에 따라 판결을 내리진 않는다. 판결의 기준은 절차다.


    인간의 판단에 오류는 반드시 발생한다. 여기서 우리는 죄 없는데 억울하게 유죄판결을 받는 사람이 많이 생기는 것과 죄지었는데 무죄판결을 받는 사람이 많이 생기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을 더 예방해야 할지 절차의 까다로운 정도를 규정함으로써 선택해야 한다. 두 오류는 교환 관계에 있다. 절차를 까다롭게 정할수록 유죄판결이 내려지기는 어려워지고, 따라서 죄지은 사람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는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절차를 느슨하게 정할수록 유죄판결이 쉽게 내려지고, 죄 없는 사람에게 유죄판결을 내리는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죄 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유죄판결을 받는 일이 생기더라도, 죄지은 사람이 빠져나갈 틈이 없게 해야 하는가? 죄지은 사람이 무죄판결을 받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는 게 우선되어야 하는가? 인간은 역사를 통해 실패에 대한 인식을 학습했다. 잘못된 판결로 인해 죽거나 다치거나 자유를 억압당한 사례가 많았고 그런 사례가 법체계에 학습되었다. 법을 이용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거나 가두는 사례도 많았다. 죄지은 사람이 빠져나간 사례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 죄 지었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인간의 판단력에 결함이 없음을 확신할수록 유죄 선고를 쉽게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실패에 대한 인식이 강할수록 유죄 선고는 쉽게 할 수 없게 된다. 어정쩡한 사람에게까지 다 유죄 선고를 하도록 절차를 완화한다면, 우리는 죄 없이도 처벌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죄 있는 사람이 처벌받지 않는 사례보다 억울한 사람이 처벌받는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유죄 판결의 절차가 까다로워졌다.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범죄 증거가 있는 용의자가 무죄판결을 받는 사례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용의자가 자신의 권리에 대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고 해서 있던 죄가 없어지진 않는다. 그러나 판사는 어떤 사람이 죄가 있는지 없는지 언제나 정확하게 판단할 수는 없다. 그걸 판단할 수 있다면 좋겠으나 오류 없이 그걸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유죄판결의 기준은 절차다.




    미운 사람은 여간해선 다시 좋아지기가 어렵다. 한 번 미운 감정이 마음에 새겨지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이 밉게 보이기 때문이다. 흔히 미운털이 박혔다고 한다. 같은 행동을 좋아하는 사람이 하면 좋은 행동이라고 여겼을 텐데 미운 사람이 하면 미운 행동으로 보인다. 그러려고 그러는 게 아니다.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보인다.


    어떤 사람이 피의자일 수 있다는 감정을 한 번 가지고 나면 그 사람의 모든 말과 행동, 주변 정황들이 그 사람을 피의자로 보이게끔 해석하게 된다. 그러나 같은 정보를 가지고 누군가(예를 들면 용의자의 친구)는 완전히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 같은 사실을 두고 자신의 감정, 가치, 당위에 따라 완전히 다른 해석을 하는 것이다.


    같은 폭력 사건을 두고 피해자는 피가 떡이 되도록 맞았다고 표현하는 반면 가해자의 친구는 쓰다듬듯이 접촉이 있었다고 묘사한다. 이중 어느 것도 진실이라 말할 수는 없다. 판사는 알려진 정보를 통해 진실에 가까울 가능성이 큰 가설을 채택할 뿐이다.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정보가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알려진 정보를 통해 형성한 가설도 기존의 가설(판결에서는 판사의 가치관이나 경험 등)에 의존한다. 즉, 같은 정보를 가지고 판사들마다 다른 가설을 형성한다.



    실패에 대한 인식은 고통을 초래한다. 뚜렷하게 현상을 파악하여 뚜렷하게 악인을 규정할 수 있으면, 하나의 답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그럴 수 없다는 게 진실에 가깝다.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하나의 답을 정해놓고 그게 답이라고 믿으며 산다. 그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즉 실패에 대한 인식을 승인할수록 행복에선 멀어진다. 행복과 진실은 교환 관계인 듯하다. 이것이 유행어처럼 돌던 배고픈 소크라테스 운운의 함의일 것이다. 행복과 진실이 교환 관계에 있다면, 삶의 궁극의 목적은 행복이라는 말을 우리는 긍정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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