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여보, 나 우울해.

우울한 감정은 부끄러운 게 아니다.

by 단아한 숲길



며칠 전, 아주 커다랗게 덩어리 진 우울감이 순식간에 나를 덮쳤다. 내 안에 견고했던 집 하나가 열을 가한 초코렡처럼 녹아내리는 게 느껴졌다. 머리가 멍해졌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침 상 차리던 일과 아들에게 잔소리하던 일을 집어던지고 침대 위로 천천히 스러졌다.


누워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용히 내게 집중했다. 대체 왜 이러는지 마음을 들여다보다가 그것조차 버거워 일단은 쉬어 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남편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 토리,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들도 다가와 물었다.

"엄마, 갑자기 왜 침대에 누워 있어?"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가만히 있었다. 박제된 새처럼, 정지된 시계처럼.

장난을 한다고 생각했는지 남편이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얼굴에 바람을 불어대기 시작했다. 짜증이 났다. 이불을 확 뒤집어쓰면서 말했다.

"그냥 기분이 안 좋아서 그러니까 잠깐만 나가 있어줘."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20대 중반에도 한번 경험한 적이 있다.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솟아오르는 눈물. 속에서 울컥 넘어오는 구토와도 같은 것. 이번에도 눈물을 토하고 나면 속이 시원해지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남편과 아들은 심각해졌다. 왜 그러냐고, 또 슬픈 글 봤냐고, 우리가 뭘 잘못해서 그러냐고 자꾸만 물어봤다. 대답하기가 매우 귀찮았지만 힘을 끌어올려 한마디 했다.

"나도 모르겠어. 그냥 우울해."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우울하다는 사실을 그대로 말했고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이유를 잘 모르니 말할 수도 없었다.


난 평소에도 눈물이 많다. 조금만 속상해도 울고, 누군가가 안쓰러워도 울고, 화가 나도 운다.

동화를 읽어주다가도 울고, 기도하다가도 울고, 가끔 보는 드라마나 영화가 조금만 슬퍼도 여지없이 운다. 심지어 뉴스를 듣다가도 운다. 나이가 먹으면 덜 할 줄 알았는데 40대 중반에 접어든 지금도 여전하다. 감성이 충만한 건지 그냥 울보라서 그런 건지는 나도 모르겠다.


자주 울기는 하지만 이런 식의 눈물은 낯설다. 분명 이유가 있긴 할 텐데 남편 때문인지 아들 때문인지, 나 때문인지 코로나 때문인지 모를 일이다. (복합적이긴 한데 이태원 나이트 확진 환자 사건 때문일 가능성이 높긴 함.)


남편이 꼬옥 끌어안으며 위로해주었다. 울고 싶을 땐 마음껏 울어도 괜찮다고 말해 주었다. 평상시의 남편보다 훨씬 부드러운 모습이었다. (부부 싸움할 때 울면 아주 냉정해짐) 남편의 위로에 마음이 잔잔해지기 시작했다. 눈물도 잦아들었다. 아들도 조용히 끼어들었다. 셋이 둥글게 포옹했다.

울음이 어느 정도 그치고 조금 웃기 시작하자 아들이 엉뚱한 질문을 했다.



"엄마, 예전에 할머니도 엄마 앞에서 이렇게 울었어?"

왜 그런 질문을 하냐고 물으니 머뭇거린다.

"혹시 엄마도 할머니처럼 우울증 걸릴까 봐 그래?"

"응. 걱정돼."

남편도 한마디 한다.

"나도 깜짝 놀랐어. 장모님처럼 우울증 걸린 줄 알고 걱정됐어."




엄마의 우울증은 온 가족을 긴장시키곤 했다. 우울증이 심해지면 표정이 아예 사라지고 온 가족을 걱정시키는 것을 심히 미안해하면서 더 우울해하셨다. 엄마의 삶을 들여다보면 부당한 일이 많았고, 슬픔도 많았다. 그걸 바로 풀어내지 못하고 가슴 깊이 억누르며 쌓아왔기 때문에 결국은 우울증이 된 것이 아닐까.


엄마에 비하면 내 삶은 평탄했고, 즐거웠으며,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아예 부당한 일이나 슬픈 일이 없었던 건 아니었으나 그걸 가슴에 묻고 힘들어 하기보다는 바로 풀려고 노력했다.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매우 낮다는 말씀이다.


다만 항상 즐거워야 하고 행복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살아왔던 것 같다. 며칠 전에 유튜브를 통해 강연을 듣고 엄청나게 공감했던 내용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슬픔, 분노, 우울, 짜증 등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서 지나치게 적대적이며, 죄책감을 느낀다. 그래서 밀어내려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감정이 어떠하든 깊이 살펴보고 위로해 주는 과정을 통해 해결되고 성장하는 것인데, 그걸 놓친다는 것이다.
날씨가 날마다 맑을 수 없듯, 우리 감정도 날마다 좋을 수는 없다. 때로 부정적인 감정이 찾아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애써 피할 필요가 없다.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위로해 주고 다시 힘을 내면 그만인 것이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맞다. 항상 즐거울 필요는 없다. 행복을 잡으려고 애써 노력할 필요도 없다. 물 흐르듯 살아가다 보면 때에 맞게 누릴 것은 누리고 이겨내야 할 것은 이겨내면 될 일이다.

우울감을 부정하거나 억지로 떨쳐내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더니 찌꺼기 하나 남지 않고 감정이 풀어졌다. 소중한 경험 하나가 더해진 것이다. 남편과 아들의 따스한 위로도 큰 힘이 되었다.


우울하거나 슬픈 감정은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숨길 필요도 없고 도망갈 필요도 없다. 이번에 아주 중요한 것을 배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태어나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