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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뽈뽈러 May 30. 2022

책 이야기 25. 우리의 밤이 시작되는 곳

# 고요한 지음


20여 년 전 서울의 한 우체국에서 매일 저녁 9시부터 다음날 새벽 6시까지 국제소포를 다루는 알바를 장기간 한 적이 있다. 전국에서 접수된 20kg 이하 소포를 각 대륙별로, 다시 각 나라별로 분류하여 공항으로 보내는 일이다. 모든 국제소포가 모이는 곳이기에 우체국 공무원 외에도 아르바이트생, 군 복무를 대체하는 사회복무요원 등 그 구성원이 다양했다.


일하러 갈 때면 늘 지나치는 곳이 명동이었다. 4호선 명동역의 밀리오레 출구 쪽으로 나와서 명동 한복판을 걸어가다가 좌측 길로 돌아가면 그때야 만나게 되는 우체국. 크리스마스 등 연말연시 시즌 때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뤘던 명동. 깊은 밤에도 불야성의 아름답고도 흐느적한 밤을 즐기는 많은 사람들을 보며 느꼈던 여러 감정들. 작업 속도가 빨라 일을 일찍 마칠 때면 새벽 첫 지하철을 기다리기 위해 피곤한 시간을 달랬던 피씨방과 스타크래프트.


이 책을 집어 든 이유는 바로 이런 20여 년 전의 유사한 상황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래간만에 옛 시절을 회고하면서 책 읽기를 한 것 같다.




# 20대 청춘들의 고민과 불안


정규직 직장인을 꿈꾸는 재호.

하지만 쉽지 않은 현실 속에서, 집 근처 서대문 지역의 한 장례식장에서 알바를 하면서 희망의 미래를 이어나가고 있다.


공무원을 꿈꾸는 마리.

그녀 역시 여러 번 낙방하는 상황 속에서, 재호와 같이 장례식장 알바를 통해 자신의 꿈을 놓지 않고 있다. 다만, 도박에 빠진 아빠에게 알바비까지 빼앗기는 현실이 그저 암담할 뿐이다.


이 둘은 장례식장 일이 한산 해지는 깊은 새벽녘에 퇴근한다. 다만, 마리는 집이 동인천이기에 장례식장 인근 맥도널드 가게에서 새벽 첫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그것을 알고서부터 재호는 항상 마리와 함께 그 시간을 보낸다. 그들의 밤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렇게 함께하면서부터, 재호의 스쿠터로 둘은 흥국생명 앞 해머링 맨, 광화문 네거리, 교보문고 염상섭 동상, 경복궁, 혜화역, 청계천, 남산 등지를 다니고, 때로는 맥도널드 가게 순례를 하면서 각자가 처한 삶에서 빚어지는 고민과 불안 등을 떨쳐내고자 한다.



# 죽음


맥도널드에서 새벽 첫 차를 기다리던 중, 잠든 줄 알았던 마리에게 재호는 자기 누나가 어릴 적에 죽었고 그 죽음은 자신 때문이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어린 시절, 누나와 함께 목조르기 놀이를 자주 했는데, 어느 날 그 목조르기 게임 중에 누나는 죽었다. 그리고 그때 엄마가 들어왔고, 재호의 기억은 거기까지다.


그 사건의 영향 때문인지 몰라도, 이후 아빠와 엄마는 이혼하였고, 엄마는 다른 남자와 재혼하여 아이도 낳으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그럼에도 아빠와 엄마는 계속 만남을 가지면서 오랜 시간을 지속해온다.


아빠는 누나의 죽음 이후, 아름답게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란 뜻의 '아죽사' 모임을 만들어 정기적 교류를 하면서 지낸다. 그리고 95년 고베 대지진 때 온 가족이 희생된 히로시라는 일본인 하숙생을 들여서 가족같이 지내며 생활한다.


그리고 이런 아빠를 재호를 통해서 알게 된 후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장례식장의 팀장까지 이 소설은 죽음과 장례식장이라는 매개를 통해 인물과 사건과 스토리가 형성되고 연결되어 간다.


그렇게 하여, 누나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 아닌 누나의 소아암 때문이란 걸 알게 되면서 오랜 세월 짓눌렀던 족쇄를 털어내는 재호. 그런 재호와 함께 상조회사 정규직 채용 면접을 본 마리와 재호는 44년간 맥도널드에서 일한 로레인 마우러 할머니처럼 자신들도 44년간 상조회사에서 장례식장 인생을 펼쳐나가기를 희망하면서 소설은 막을 내린다.




이 책을 접한 계기 때문인지, 책을 읽으면서 주로 재호와 마리라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20대 청춘들의 당면한 현실이 깊게 다가왔다. 단군 이래 취업하기 가장 힘든 시대에 놓여 있다는 20대 청년세대. 위로와 대안 마련 속에서도 여전히 쉽지 않은 현실은 불안한 미래를 가시지 않게 한다.


그런 점에서 녹록지 않은 오늘에도 부단히 애쓰고 미래를 개척해나가는 지금의 20대들에게 마음으로나마 어떻게든 힘내라고 얘기하고 싶다. 또한 명동의 깊은 밤, 열심히 땀 흘렸던 20여 년 전의 나에게도 그저 애썼다고.


이 소설은 우리 사회의 불완전한 가족 관계, 이웃 내지 친구 관계, 죽음에 대한 준비라는 새로운 패러다임 등 관점에 따라 들여다볼 요소들이 다양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앞서 언급한 개인적 경험에 따른 지금 20대들의 현실이 더욱 다가왔는데, 혹시나 다시 읽게 된다면 그때는 새로운 관심에 따라 또 다른 측면에서 소설을 바라볼 수 있지 않을지.


한편, 장례식장 알바만 하다가 인생이 끝나게 되는 건 아닐지 자조하면서도 결국엔 장례식장 일이 적성에 맞을지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상조회사 정직원 채용 면접을 보는 행위에서, 그들의 희망을 응원하게 되면서도 한편으론 결국 순응해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에도 어쨌거나, 희망을 품고 도전하는 대한민국 모든 20대들을 응원한다.



& 아래는 소설에 등장한, 몇몇 각인된 대화들.


우린 가장 취업하기 힘든 시대에 사는 거 같아. 정말 이민이라도 가고 싶다.
우린 가진 돈이 없어 받아주지 않을 거야.
하긴, 알바를 받아주는 나라는 없겠지.


진짜 재미없는 세상이야. 우리는 산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일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일하니까. 이곳마저 잘리면 어디로 가야 할까. 설마 화장터나 무덤을 지키는 알바를 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어쩌다 나는 여기까지 흘러왔을까. 돌이켜 보면 난 안 해본 알바가 없어. 편의점, 카페, 레스토랑, 노래방, 가구점, 만화가게, 과일가게... 시급 육천 원대에서부터 만 원대까지 다 해봤어. 육천 원과 만 원 사이를 오가다 장례식장까지 온 거야. 이러다 알바가 평생직장이 될까 두려워.


우리에게도 그런 날이 올 거야. 저 물고기도 자신이 날아갈 줄은 꿈에도 몰랐을 테니까. 우리도 언젠가는 정규직 일자리를 얻을 거야. 물고기처럼 훨훨 하늘을 날아갈 거야. 산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일할 날이 올 거라고.


난 사람들과 잘 못 섞여 알바를 그만둔 적이 많아. 여럿이 일하는 건 정말 피곤해. 그래선지 몰라도 어느 땐 장례식장 일이 맞는 것도 같아. 이 일은 셋만 마음이 맞으면 되니까. 진상이 없다는 게 이 일의 장점이야. 가끔 진상을 떠는 조문객도 있지만 어차피 그들은 몇 시간 있다 가니까.



2022.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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