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자라는 순간들
나는 긴장도가 높은 편이고 예민해서, 평소에는 세상 온화하다가도 뭐 하나가 마음에 안 들면 거기에 꽂혀 쉽게 바닥을 드러내곤 한다.
아이는 아빠를 닮아 비교적 순한 기질에 속한다.
얼마 전 오은영 박사님이 하신 말씀이라며 떠도는 글을 보았는데,
부모가 아이에게 화가 나는 지점은 부모 자신의 어린 시절 욕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내가 하지 못했던 것, 내가 채우지 못했던 부분을 아이가 건드릴 때 ‘화’라는 감정이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얼마전에 나에게 일었던 ’화‘의 감정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날은 야심차게 등록했던 레고 체험 수업을 진행하러 간 날이었다. 아이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할 수 있어 부모로서 뿌듯했다.
체험 수업이 끝나고 아이는 그 곳에서 좀 더 머물기를 원했고, 아이의 뜻에 따라 모든 아이들이 돌아간 이후까지 아이가 하고 싶은 활동을 할 수 있게 배려했다. (같은 수업 친구들이 모두 돌아간 텅빈 교실에서 다음 수업 아이들이 올 때까지 남아있는 건, 나로서는 엄청난 배려였다!)
그 이후 아이는 또 다른 체험을 하길 원했고, 아이의 좋은 기분을 맞춰주고자 2개 정도 더 할 수 있게 해줬다.
그런데 이제 정말 집에 갈 시간이 되어 가자고 했는데, 아이는 끝도 없이 또 ‘요구’를 해댔다.
사실 2주 전에 아이가 뮤지컬을 배우고 싶다고 해서 뮤지컬 수업을 신청 했었는데 1회만 가고 2주째 수업을 가지 못한 상태였다. 당시에 아이에게 수업이 괜찮았느냐,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그 때는 분명히 한다고 했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수업을 안하고 싶다고 했다.
뮤지컬수업은 구청에서 하는 저렴한 수업이긴 했지만 아파서 못간 비용에 또 못가게 될 비용, 그리고 그 돈으로 내가 할 수 있었던 기회 비용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언짢았다.
하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고 나름 노력하고 그 마음을 숨겨왔는데, 엉뚱하게도 레고 체험 수업 현장에서 폭발한 것이다.
어린 아이는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지만, 그 댓가로 나진상가를 빠져나오는 동안 엄마의 잔소리 폭격을 들어야 했다.
너무 찜찜했다. 이성적으로는 화를 내지 않을 수 있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슴으로는 너무 화가 나고 답답했다.
오은영 박사님의 말씀에 덧대어 나의 어린시절을 돌아보았다.
나는 어린 시절 배우고 싶은 게 너무나 많았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 배울 수가 없었다. 하고 싶은 걸 모두 부모님께 요구할 수도 없었고, 늘 혼자 생각만 하다 정말 하고싶은 것을 말하곤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배울 수는 없었다.
나는 아이가 해맑게 요구를 할 때 처음에는 좋게 받아 들였지만 어느 정도 내가 생각한 선을 넘었을 때는 요구가 불편해 지기 시작했다. 눈치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뮤지컬을 배우고 싶다고 해서 기껏 해줬는데, 하고 싶지 않다고 하니 돈이 너무 아까웠고, 돈 아까운 줄 모르고 해맑게 얘기하는 것에 화가 났다.
만약 내가 어린 시절에 배우고 싶은 것을 모두 잘 배우고 자랐다면 어땠을까?
나는 이것을 아이가 모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친절하게 설명해 줬을지도 모른다. 그 시절의 나도 돈이 아까운 줄 모르고 자랐을 수도 있고, 그러면 지금 돈이 아까운 줄 모르는 아이를 이해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내 어린 시절은 그렇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채워지지 않았던 부분이 이렇게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다.
아이의 어린 시절은 이렇게 중요하다.
어른이 되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잘 살 줄 알았는데, 이렇게 예기치 못한 곳에서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를 발견한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다가가 가만히 바라보고 상처를 보듬어 준다.
“너는 아무 잘못이 없어. 그럼에도 잘 자라줘서 고마워”
어린 시절의 내가 웃어야, 나의 아이에게로 웃으며 갈 수 있다.
나는 나의 아이의 어린 시절이 나의 화로 인해 물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의 아이가 커서 자기 자식을 대할 때, 나와의 안 좋았던 감정으로 인해 불쑥 불쑥 화가 치밀어 오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올바른 소비관념과 돈에 대한 절제는 당연히 배워나가야 할 과제이다.
이 뿐만 아니라, 모든 어른이 되기 위한 끊임없는 시도와 실패 속에 배워나가야 하는 과정 중에는, 부모 각각의 ‘어린 시절의 결핍’으로 인해 ‘훈육‘보다는 ’감정‘이 앞서 아이를 지도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나도 그 순간에는 내 ‘감정’이 ‘맞는 생각’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물론 욱 한 것은 미안했지만, ’따끔한 훈육‘이라는 포장으로 덮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은영 박사의 ‘못 참는 아이, 욱 하는 부모’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나의 해결되지 않은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표현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부모가 욱해서 소리를 지를 때 아이가 가만히 있는 것은, 부모를 존경해서나 부모의 생각이 옳아서가 아니다. 어릴 때는 그런 부모가 무서워서 몸도 마음도 그 순간 꽁꽁 얼어서 꼼짝 못하는 것이고, 좀 자라면 ‘아, 또 난리네’하고 부모를 피하는 것이다.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든, 그 감정을 남에게 표현할 때는 그것이 과하게 부정적이라면 순화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나진상가에서 아이에게 “적당히 하라고, 지켜야 할 선이 있다고” 했던 잔소리는 분명 훈육이 아니었다. 나의 해결되지 않은 미숙한 감정이었다.
나는 아이에게 그렇게 했던 배경과 잘못했던 행동에 대해 사과했다. 아이는 늘 그렇듯 넓은 마음으로 안아주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감정이라는 바다에서 매일 항해를 이어 나간다.
즐거움의 감정은 서핑을 타듯 그 순간을 최대한 스릴있게 느껴야 한다.
슬픔의 감정은 철썩이는 파도를 그대로 맞으며 지나가게 한다.
분노의 감정은 폭풍과 같은 비상상황이므로, 최대한 배가 뒤집히지 않게 고군분투해야 한다. 분노를 다른 사람에게 쏟아부으면 배는 가라앉고 있는 것이다.
이 배에 아이와 함께 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안전한 항해를 위해 좀 더 고군분투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