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귀에 낯설지 않고 익숙한 곡조가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이다. 이를 작사한 존 뉴턴(1725~1807)은 흑인노예를 운송하는 배에서 일하다가 나중에 그 자신이 직접 노예선의 선장이 되었다. 한번은 그가 탄 배가 큰 폭풍우를 만나 죽을 고비를 맞았다. 여태 형식적인 신앙인이었던 그는 생애 처음으로 진심어린 간절한 탄원을 하늘에 향해 토해냈다. 기도했던 그의 바람대로 그는 구사일생의 위기에서 구원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크게 회심하고 영국 성공회의 목회자가 되었다. 그는 참회의 의미로 영국의회에서 노예선의 비참한 현실을 폭로했다. 그에게 감화 받은 국회의원 윌리엄 윌버포스는 ‘만인은 신 앞에 평등하다’는 전제하에 노예제 폐지에 힘썼고, 마침내 영국에서 노예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 노래는 서부개척시대 체로키 인디언들이 백인들에게 내쫓기면서 그들의 삶을 안위하는 노래로 간절한 탄원을 담아 불렀기에 애절함이 더하고, 미국인들은 애국가 다음으로 애송하는 곡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은 일생을 살아가며 여러 번 일생일대의 변곡점을 지나거나 전환점(轉換點)을 맞닥뜨리게 마련이다. 나라의 명운도 그러하거니와 임진왜란에 대비하지 못했을 때 수백 년 지나 조선은 일제의 서슬 퍼런 칼날 앞에 다시 서게 되었다. 우리는 임진왜란으로 끝난 줄 알았지만 국토가 섬나라인 일본은 승냥이의 이빨을 숨기며 대륙을 넘보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한반도 정벌은 아직도 끝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제만 아니라 미국과 영국 소련과 러시아 등 각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타국의 영토와 국민들을 집어 삼켰다. 그래서 해방된 나라의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유명한 구호를 외쳤고, 제헌국회에서 민주국가의 기초를 쌓아올렸다. 역대정부나 대통령은 하나같이 국태민안의 명분으로 개혁의 슬로건을 내걸며 구호를 남발했다. ‘경제개발5개년 계획과 새마을운동’ 문민정부의 ‘신한국건설’ 국민의 정부의 ‘한반도평화통일’ ‘참여정부’의 대연정 제안,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과 ‘저탄소 녹색성장’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 등이 그것이다.
이번 문재인 정부의 가장 큰 치적이 적폐청산일 것이다. 이 정부 사람들은 5년 단기 정부임에도 공공연히 20년 장기집권을 흘려왔고, 심지어 100년의 치세를 말하기도 했다. 100년 전 일제 식민통치시대로 돌아간 듯 반일구호가 요란했고, 우리역사를 독재와 부정부패로 몰아붙이며 자신들의 정의감과 공명정대를 엄청 자랑했다. 또 이념과 사상에 찬성하는 사람들만 먼저인 정부를 꾸려왔다. 정권의 중반을 지나며 임기 말을 향해가는 지금 국민들은 극심한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전 세계의 시계는 1년 전부터 거의 멈춰있는 형국이다. 국민들은, 소시민들은 평범한 일상을 원하고 있다. ‘다 같이 잘살아보자’는 평범한 슬로건이 왜 이리 간절할까.
법무부장관이 검찰개혁의 기치 아래 1년 허송세월을 보내는 동안 법무부에서 예산이 없어 구치소에 수감중인 재소자들이 마스크조차 착용하지 못하고 천명이 넘는 코로나 확진자가 생겼다. 국회 증인으로 나와 광화문집회 사람들에게 살인자로 내몰며 격앙했던 청와대 비서실장은 이 많은 확진자를 두고 뭐라도 논평할 텐지 궁금하다. 민주화운동에 일생을 바쳤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정부에서 필자는 오늘 ‘다 같이 잘살아보자’는 평범한 슬로건이 왜 이리 간절할까. 총칼을 들고 무찌르자는 혁명가 대신에 어메이징 그레이스 같은 천상의 선율을 합창하며 서로의 평화를 도모할 수는 없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