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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한 사람의 일생이 오는 순간

방문객, 정현종

by 운아당

한 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단지 글자를 따라 읽는 일이 아니다.
그 시를 쓴 시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아직 쓰이지 않은 미래까지 함께 마주하는 일이다.
가을비가 마지막 남은 물기까지 쏟아내며 떠나는 밤, 시를 낭송하며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이 밤, 무엇을 찾아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일까.
어쩌면, 시를 통해 누군가를 만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오래도록 그 문장을 붙들고 있었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내 앞에 서 있다는 건, 단지 그 한 순간이 아니라
그가 살아온 시간들, 겪어낸 마음들, 그리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간까지
모두 함께 와 있는 것이라는 말에 나는 숨을 멈추었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때로 너무나 거칠다.
그 마음이 몇 번이나 부서졌는지, 몇 번이나 일어섰는지 우리는 다 알 수 없다.


하지만 시인은 말한다.
부서지기 쉬운 마음이 온다고.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지금 내 앞에 있다고.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이 얼마나 다정한 표현인가.
누군가의 마음을 더듬어볼 수 있는 바람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만남은 따뜻함이 되고,
그 자리는 환대가 된다.

우리는 매일 많은 사람들을 마주친다.
하지만 그중 몇 사람은,
유난히 내 마음에 오래 머문다.
말없이 건넨 눈빛 하나, 조용히 함께한 시간 하나가
마음 깊은 곳에 오래도록 남는다.
그것이 인연이다.

인연은 말로는 쉽게 불릴 수 있지만,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내 앞에 와 준다는 건,
그 사람의 한 생이 나에게 온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마주했느냐가
그 인연의 무게를 결정한다.

비 오는 밤, 굵은 빗줄기 소리 사이로 울려 퍼지는 시 낭송은
활자에 생기를 불어넣고, 그 울림은 마음에 파문을 만든다.
그 낭랑한 목소리와 마음으로 따라 읽는 구절 사이로
나는 하나의 결심을 해본다.

어떤 인연도 가볍게 대하지 않겠다고.
지금 내 앞에 와 있는 한 사람에게
그의 시간과 마음을 존중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겠다고.
그가 머물고 간 자리를 따뜻하게 기억하겠다고.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렇게 머물다 가는 인연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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