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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My Story

영수야 미안하다

너는 상처받았을 그때의 나의 승리를 이제 사과할게

by 운아당

그날 호랑이 할머니 집에 간 것이 잘못이었다. 그 집에는 여섯 살 손자가 있었다. 나랑 동갑인 영수다. 바로 앞집인 영수집은 큰 기와집에 마당도, 마루도 넓어서 놀기에 좋았다. 영수는 조용한 아이였는데 호랑이 할머니는 이런 손자가 생기가 넘쳤으면 하는 마음에 그랬는지 놀러 오는 아이들에게 아주 친절하게 대했다. 그런 까닭이었던지 친구들과 나는 그 집을 동네 놀이터처럼 자주 드나들었다.


그날은 추운 겨울 오후였고 나 혼자 심심해하다가 혼자서 영수집에 놀러 갔다. 호랑이 할머니는 나를 보더니 어서 방으로 들어 오라며 반겼다.

"아이고 우리 복슬강아지 왔나. 춥재. 어서 들어오너라. 요기 따뜻하다. 앉아라."

온 동네에 무섭기로 소문난 할머니여서 호랑이 할머니라 별명이 붙었지만, 나를 특별히 예뻐해 주었다. 성씨가 같아서 아버지는 호랑이 할머니를 집안 어른으로 깎듯이 대했기에 그랬을 수도 있고, 내가 동네 어른들 앞에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잘 춰서 웃음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라 짐작해 본다. 할머니는 곶감과 사탕을 내 앞에 내어 놓으면서 많이 먹어라고 하더니 밖에 있는 손자를 부른다.

"영수야 니도 와서 묵어라."

영수는 슬그머니 들어와서 내 옆에 앉아 곶감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러자 할머니가 느닷없이 말했다.

"영수야, 니 그거 먹고 아그랑 씨름 한 번 붙어봐라. 누가 이기는가 보자. 니 오늘 지면 바지 벗기고 밖에 내 쫒을 기다."


영수는 순간 눈이 동그래졌다. 곶감 하나를 집어서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다가 꿀꺽 삼키고 몸을 미적거리며 일어났다. 나도 따라 일어섰다. 영수는 할머니의 겁박에 거의 울상이 되었지만 뭔가 단단히 결심을 한 듯 보였다. 밖에 내쫓기지 않으려면 죽을힘을 다해야 할 것이었다. 나도 벌떡 일어났다. 그때 나는 약간 으쓱하는 마음이었다. 얼마 전 영수와 팔씨름해서 이긴 적도 있고, 동네에서 어린것이 팔힘이 세고 뚝심이 있다고 소문이 났었다. 게다가 호랑이 할머니는 나를 예뻐해 주는 어른이 아닌가.


우리 둘은 서로 엉겨서 힘으로 밀어붙이고 하다가 내가 영수를 넘어뜨렸다. 아직 나이가 여섯 살이니 남자와 여자의 힘세기가 그렇게 차이 나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영수가 좀 약해서일까. 아니다. 어릴 적 나는 자신감에 꽉 차 있었다. 내가 이길 것이라고 어린 마음에도 확신하였다. 게다가 나를 좋아하는 할머니가 있으니 더 이기고 싶은 마음이 컸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이기고도 기쁘지가 않았다. 영수의 절망에 찬 그 눈빛을 봤기 때문이다. 그때의 알 수 없는 감정이 육십여 년이 지났는데도 온몸으로 기억하고 있다.


영수는 몸도 약하고 좀 소심했다. 호랑이 할머니는 손자가 강했으면 하는 마음에 늘 타박을 하였다. "사내자식이 힘이 그리 없어서 뭐 해 먹을래, 아무거나 잘 묵어야 힘이 세지는데 입이 짧아서."라며 혀를 끌끌 차기도 하고 나무라기도 했다. 손자가 남자답게 씩씩하게 자랐으면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날 나와 씨름을 붙인 것은 그래도 자기 손자가 딸아이에게는 이기겠지 생각했는지 모른다. 아니면 손자가 자극을 받아서 잘 먹고 좀 남자답게 커가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아이고 이놈아, 가스나한테도 지나. 니 오늘 밥은 없다. 이리 와라." 그러더니 바지를 발가벗기고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내 쫒았다. 그때는 한겨울이었다. 바깥은 추워서 옷을 입고 있어도 떨리던 날씨였다. 나는 친구를 혼내는 것을 보고 그만 울면서 집에 돌아오고 말았다. 그 뒤로 나는 영수의 보디가드가 되어 누가 건드리기만 하면 달려가서 말로, 힘으로 혼내주곤 했었다.


얼마 전, 엄마집에 갔었다. 경로당에서 방금 오는 길이라면서 영수가 경로당을 찾아왔었다고 한다. 과일과 떡과 금일봉을 가지고 와서 어른들에게 인사를 하고 갔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영수를 몰라봤는데 가까이 곁으로 오더니 인사를 하더란다.

"저 영수입니더. 호랑이 할머니 손자입니더. 금이랑 씨름해서 졌던 영수라예."

"아이고 그렇나, 몰라보겠네. 고맙다. 이래 어른들께 인사하러 오고."

엄마는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호랑이 할머니가 몇 번을 말하더라고 한다. 복슬강아지가 사내아이 영수를 이겨먹었다고.


영수는 공무원 퇴직을 하고 다시 어릴 적 살던 동네로 이사를 왔다. 그도 어릴 적 추억이 그리웠던 것일까. 우리는 세상 속으로 무엇을 찾으러 떠났다가 무엇을 찾은 지도 모른 채 다시 출발점에 돌아와 유년의 추억을 떠올리고 있다. 이제 몸이 약한 그를 그렇게 애달파하던 호랑이 할머니는 물론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다. 내가 기억하는 것처럼 영수도 그때의 일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영수야 꼭 한 번 만나고 싶다. 60년이 지났지만, 너는 상처받았을, 그때의 나의 승리를 사과하고 싶다. 영수야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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