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괜찮다 니만 잘살면 1
노모는 그저 자식이 편안하게 잘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오래된 정자나무 아래 할머니들이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한가로워 보였다. 햇빛이 화살촉처럼 내려 쬐이던 뜨거운 여름 오후에 매미소리도 요란하다. 모자를 쓴 것처럼 머리가 하얀 노모 한 분이 한숨을 쉬어가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둘러앉은 대여섯 동네 어른들이 귀를 기울이며 안쓰러운 표정으로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표정이 사뭇 진지해 보였다. 나는 목례 인사를 하며 한쪽 옆에 살짝 걸터앉았다. 할머니들은 눈으로 내 인사를 받고 하던 이야기를 마저하라며 재촉했다.
노모는 얼마 전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차서 인근 병원엘 갔더니 심장에 이상이 있어 서울에 있는 종합병원에를 갔다. 함께 살고 있던 둘째 며느리와 할아버지가 같이 올라갔는데 다행히 서울에는 큰 아들이 살고 있었다. 노모는 정밀검사를 이틀간에 걸쳐하게 되어, 검사 기간 중에 큰 아들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드디어 정밀 검사 결과가 나오고 수술 날짜가 보름 후로 잡혔다.
“수술을 하려면 보름이나 일자가 남았으니 아버지와 제수씨는 진주로 내려가고 어머니는 저의 집에서 쉬다가 수술을 받으시도록 하시죠”라며 큰아들이 권유했다.
큰 아들의 말대로 둘째 며느리와 할아버지는 진주로 내려가고 노모는 큰 아들 집에 머물게 되었다. 큰아들은 최근에 새로 지은 넓은 아파트로 이사한 후였고, 처음 방문이고, 큰 아들 결혼 후 처음 함께 생활하는 것이라서 있어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큰아들은 어릴 적부터 영리하여 집안의 자랑거리였다. 초, 중, 고교를 진주에 있는 명문학교를 나오고 서울 명문대학에 합격하였다. 지방에서 서울 유학시키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부모님은 밤낮없이 농사일을 열심히 해서 서울의 유명대학을 졸업시켰다. 큰아들은 대학 교수가 꿈이라며 외국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도 취득했다. 그리고 서울의 명문대학에 교수가 되었다. 부모님의 희생적인 뒷바라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파트는 넓고 호사스러워서 아들이 잘 사는구나 하고 뿌듯하였다. 평수도 넓고 일하는 아줌마도 있고, 가구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그날 밤 노모는 며느리가 던져준 누더기 이불을 뒤 집어 쓰고 울 수밖에 없었다. 며느리가 아들에게 어머니를 집에 있게 했다고 밤새도록 따지고 싸우더라는 것이다. 며느리는 서울사람이고 대학도 훌륭한 대학을 나와서 약국을 경영하고 있었다.
이튿날 노모는 아들에게 말했다.
“집을 떠나니 밤에 잠도 잘 오지 않고 들에 하던 일도 있어 진주 갔다가 수술일자 맞추어 서울로 올라오련다.”라고 하고 진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큰 아들이 며느리에게 거칠게 당하는 모습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며느리 친정이 부자라는데 우리가 못 사니까 구박을 하는구나, 이 어미가 서울에 눌러앉을까 싶어 며느리가 저런 행동을 하나 싶어서 한시라도 있고 싶지 않더라는 것이다.
부모는 큰아들이 고향에서 알고 지내던 마음씨 착한 처녀와 결혼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서울의 며느리는 아들을 사랑한다며 적극 애정 공세를 펴서 아들이 넘어갔다며 그때 결정을 잘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 결혼진행과정에서도 사돈 쪽에서는 여러 가지로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진행하여 마음에 많은 상처를 받았으나 아들만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다고.
며느리는 결혼 후 3년이 지나자, 설, 추석 명절, 시부모님 생일 시에도 한 번도 진주로 내려오지 않고 아들만 내려온다고 하였다. 명절 때 손님이 더 많다는 이유였고 약국을 닫을 수 없다는 게 핑계였다. 안부 전화 한 통 하지 않고 해마다 김장을 해주고 간장 된장을 담가 주어도 고맙다는 인사말 한 번 없다고 한다.
큰 아들이 명절 때 혼자 내려오면 거나하게 술이 취해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말했다.
“정말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큰 며느리는 없는 셈 치세요. 말을 해도 안되고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제가 잘할게요”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오히려 아들은 얼마나 괴로울까 싶어서 오히려 위로한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 너의 가족이 화목하게 잘 살면 되는 거라.”라고.(2023.11.4. <있는 그대로>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