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순둥이 언니는 왜 폭발했나

그녀가 달라졌다.

by 운아당

‘폭발’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속에 쌓인 감정이 한순간에 세차게 터져 나오는 것”이라 한다.
언니의 분노도 그랬다.
우연히 튀어나온 감정이 아니라,
수십 년간 눌러 참고, 꾹꾹 쌓아두었던 마음이 결국 터져 나온 것이다.
종기처럼 곪아가다, 더는 감출 수 없어 한순간에 터진 것이었다.

전화기 너머의 언니는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늘 순하고 따뜻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언니가 그렇게까지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나는 처음 알았다.

그 분노의 대상은 남편이었다.
말없이 함께 살아왔지만, 이제 더는 견딜 수 없다고 했다.
마음을 나눌 줄도, 함께 위로할 줄도 모르고,
몸 하나 움직여 도와줄 줄도 모르는 사람.
그는 늘 그랬고, 이제는 그 무심함조차 버겁다고 했다.


그녀는 오랜 세월 아픔을 견디며 살아왔다.
직장암 수술 후 다섯 해 동안 투병했고,
그 시간에도 감사와 기도를 놓지 않았다.
살아있음에 고마워했고, 오히려 주변을 더 살폈다.
이제는 암이 사라졌으니, 건강 관리만 잘하면 된다고
의사들은 말했다.

하지만 다섯 달 전부터 음식을 삼키기 힘들어졌고,

몸은 점점 마르더니,
한 달 전엔 뼈만 남은 채 사경을 헤맸다.
결국 응급 수술을 받았고, 그제야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그녀는 그렇게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사람이었다.

그녀의 삶은 늘 자기 자신보다 남을 먼저 세우는 삶이었다.


1남 4녀 중 장녀.
맨손으로 피난 온 부모를 도우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친구들처럼 진학할 생각도 못 한 채
공장에 취직했다.
그 돈으로 오빠와 동생들 학비를 댔다.
그저 그렇게, 누구의 덕도 없이 누군가의 밑거름이 되었다.

결혼 후에도 바뀌지 않았다.
순한 농부 남편과 함께 흙을 일구며 살았고,
자신의 삶은 늘 뒤로 미뤘다.

한 번은 그녀 집에 묵었던 적이 있다.
새벽 네 시, 작은 속삭임 같은 소리에 눈을 떠보니
그녀는 두 손을 모은 채 조용히 기도하고 있었다.
그게 그녀의 하루 시작이었다.

이번에도 수술은 잘 끝났다.
하지만 그녀는 32킬로그램 남짓.
등 뒤 뼈마디가 손에 잡힐 정도였다.
병원에서는 남편이 그녀를 붙들고 함께 걸음을 연습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잠시 안심했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자,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남편은 여전히 집안일을 전혀 하지 않았고,
물건은 아무 데나 널브러져 있었고,
반찬 하나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녀가 부탁을 하면 툭, 하고 감정을 내비쳤다.
말 한마디에도 자존심이 상하는 듯, 삐딱한 대꾸만 돌아왔다.

쓸모없는 물건 좀 치워달라고 하자
“죽고 나면 다 태울 건데 뭐 하려고 치우노.”
그게 그의 말이었다.

그녀가 바라는 건 크고 어려운 게 아니었다.
돈도, 헌신도, 대단한 봉사도 아니다.


그저 따뜻한 말 한마디. 함께 눈을 마주하고, 마음을 나누는 대화.
힘들 때 옆에 있어 주는 아주 작은 손길.

그녀는 그렇게 말해주길 바랐다.

“고맙다. 살아 돌아와 줘서.”
“수술 견디느라 고생했어. 이제는 내가 도와줄게.”
“그동안 너무 고생만 했지. 이제부터는 마음 편히 살아.”

그녀의 분노는 그런 말 한마디 없었던 시간들의 무게였다.
평생을 마음으로는 나눌 수 없었던 시간들이,
수없이 쌓이고 쌓여,
어느 날 폭발한 것이다.

어쩌면 그녀의 삶엔
누군가 따뜻하게 불러주는 이름 하나,
지친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 하나가
필요했던 것일지 모른다.

겉으로는 순종적이고 희생적인 삶을 살았던 언니의 내면에,

말하지 못하고 참고 살아온 감정의 응어리가 있었고,

그 감정은 병마와 외로움, 외면 속에서 더욱 깊어지고 곪아갔나 보다.

그녀가 바란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작은 공감과 따뜻한 말 한마디, 존중받는 존재로서의 인정이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노년의 강물은 끝까지 흘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