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쪽같이 속았다.
강이 흐르고 있어서 더 도드라졌던 걸까.
분명 아파트에 불이 난 줄 알았다.
창문 밖으로 뱀의 혀처럼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강변을 따라 산책하던 나는 숨을 멈췄다.
신고를 해야 하나, 얼른 뛰어가야 하나.
자세히 보니, 그 아파트는 서향이었다.
서쪽 창문에 석양이 깊게 내려앉고 있었다.
붉은 빛이 유리에 반사되어 불꽃처럼 보였던 것이다.
마치 진짜 대형 화재처럼 보였던 풍경은, 실은 아무 일도 없는 ‘빛의 장난’이었다.
그 순간 가슴이 철렁하면서도,
이렇게도 눈이 쉽게 속는다는 게 신기했다.
사진으로 찍은 불빛은 더욱 실감나게 나왔고,
나는 새삼 깨달았다.
우리는 ‘보이는 대로’ 세상을 믿지만,
사실은 ‘뇌가 만들어낸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왜 우리는 눈으로 본 것을 쉽게 믿을까?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지각(perception)의 왜곡이라고 부른다.
우리 눈은 ‘빛’을 받아들이는 감각기관일 뿐,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결국 뇌가 해석해서 보여주는 결과다.
즉, 뇌는 우리가 보고 듣고 느낀 감각 정보를
기억, 기대, 감정 같은 심리적인 요소들과 섞어서
‘현실’이라는 영화를 만들어낸다.
실제로 심리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믿고 있는지에 따라 세상을 본다.”
— 심리학자 애나이스 닌(Anais Nin)
그래서 두 사람이 똑같은 상황을 보고도
완전히 다르게 받아들이는 일이 생기는 거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말투가 ‘차갑게’ 느껴졌다면,
그게 진짜 차가운 게 아니라
내가 최근에 상처를 받아 ‘민감해진 상태’일 수도 있다.
보이는 진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진실.
불길처럼 보였던 건,
사실 따뜻한 석양이었다.
우리는 종종 이런 ‘감각의 착각’ 속에서
크게 놀라고, 오해하고, 때로는 상처받는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항상 진실은 아니며,
때로는 내가 느끼는 감정조차도 진실이 아닐 수 있다.
심리학에서는 "인지 왜곡(cognitive distortion)"이라는 말이 있다.
이건 우리가 상황을 해석할 때
무의식적으로 왜곡되게 받아들이는 습관을 말한다.
예를 들어,
“저 사람은 나를 싫어할 거야.” (근거 없이 확신)
“내가 실수했으니까 다 망한 거야.” (전부를 하나의 실수로 판단)
이런 생각들은 ‘진실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우리의 감정이나 과거 경험이 만들어낸 ‘마음속 왜곡된 그림’이다.
내가 본 것은 더 넓은 세계다.
그날 강변에서 본 불빛은
내게 작은 충격과 큰 깨달음을 동시에 주었다.
세상은 우리가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사람들의 마음은 그 안에서 더 깊게 움직이고 있다.
그러니 누군가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도
너무 단정 짓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느끼는 슬픔이나 고통도
혹시 ‘내가 만들어낸 진실’은 아닐까 되돌아보게 된다.
우리가 보는 것, 느끼는 것, 믿는 것이 전부는 아니니까.
때로는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볼 때,
비로소 진짜 진실이 보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