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식사 후 느긋한 시간, 습관처럼 까맣게 꺼져있는 핸드폰을 밀었다.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키패드가 화면에 떠올랐다. '어, 이상하다.' 나는 핸드폰 비밀번호 설정한 적이 없는데 갑자기 비밀번호를 넣어라는 것이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언젠가 비밀번호를 설정했다가 불편해서 지워버린 적은 있었다. 하지만 나의 핸드폰이 내 명령도 없이 갑자기 비밀번호를 들먹이며 내 집 문을 잠가버렸다. 아무리 머리를 짜내어 계좌비밀번호, 대문 비밀번호, 전화번호 등 평소 쓰는 것을 이것저것 입력을 해도 일치하지 않다고 하니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딸이 쩔쩔매는 나를 보더니, 유투버, 네이버 검색창으로 다니면서 어떻게 알아내서 초기화를 해야 한다고 한다. 초기화를 하면 그동안 핸드폰에 있는 자료가 다 날아가는데 괜찮으냐는 것이다. 사진 하나도 버릴까 말까 고민하며 고이 갤러리에 모아두었는데, 소중한 인연으로 만난 사람들의 연락처 등을 생각하니 세상과 갑자기 끈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면서 아찔하다. 내일 대리점에 가서 하자고 했다. 전문가는 해결해 주지 않겠는가. 영원히 사라지려는 내 삶을 살리고 싶었다. 그런데 딸은 내 핸드폰을 들고 자기가 한번 해보겠다고 이리저리 눌러보더니 밖에 있는 나에게 다가오면서 웃음인지 우는 것인지 모를 표정으로 큰일 났다는 것이다. 초기화를 시켜버렸는데 백업을 하나도 못하고 다 삭제해 버렸다는 것이다.
무심코 살아왔는데 알고 보니 핸드폰이 내 세상이었다. 그동안 살아온 나의 흔적인 사진들을 보관해 두었고, 살아오면서 인연 맺은 수많은 사람들과의 연락처, 카카오톡으로 나눈 정다운 이야기들, 나의 관심을 끌었던 관심사들의 자료들이 그 속에 다 들어있었다. 나의 실존적 집이 아니라 본질적인 나의 집이었다. 연락처 방도 깨끗이 비어있다. 카카오톡의 대화들도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져 있었다. 내가 버린 것이 아니라 싹 다 없애버렸다. 수시로 그것들을 꺼내보며 마음을 달래던 것들과 영원히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내가 없어지는 것 같은 상실감을 느꼈다. 오직 나의 인생이 알 수 없는 공간 속으로 사라져 가는, 뭔가 잡힐 듯 하지만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이 세상을 떠날 때도 내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한평생 쓰고 쌓아둔 것들을 한 순간 싹 지우고 그 끈을 끊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순간 들었다.
친구에게 돈을 입금하려고 하다가 인터넷 뱅킹도 날아가버려 앱을 새로 설치를 해야 했다. 친구들과의 모임인 밴드도 새로 다운로드해야 했다. 카톡으로 받았던 좋은 시를 다시 감상하려 했지만 날아가 버렸다. 모든 것을 새로 지어야 한다. 브런치 글에 사진을 올리려 하니 사진이 한 장도 없다. 리모델링이 아니라 부수고 재건축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로마로 통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핸드폰으로 통하는 나의 삶이었다. 그런데 하나씩 다시 설치를 하다가 한편으로 시원한 마음도 들었다. 지저분하고 복잡한 집을 깨끗이 청소한 개운 함이었다. 핸드폰을 가득 메우고 있던 수많은 앱들, 버리지 못해 모아둔 수천 장의 사진들, 이름도 알지 못하는데 저장되어 있는 혹시나 하며 지우지 못한 전화번호들에게 미련 없이 작별인사하였다. 수년간 안 입는 옷을 버린 후의 마음 같았다. 쌓아둔 쓰레기를 버리고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올 때의 개운 함이었다. 다시 짓게 될 내 집이 궁금해졌다.
아 다행이다. 다시 시작할 수 있어서. 내 인생 다시 리셋할 수 있어서. 고맙다. 핸드폰의 이상한 작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