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가르치는 그림책에 이런 그림이?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릴까
그림책 한 권을 마주했을 뿐인데,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습니다.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생각하는 ㄱㄴㄷ』.
그림책 매거진 ‘가온빛’에서 “그땐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글을 읽고, 충격적인 장면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ㅁ’을 형상화한 그림 속에서, 한 남자가 여자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있습니다. 어떻게 작가는 자음 ㅁ을 만들면서 이런 그림을 상상했을까요?
이것이 단지 하나의 자음 그림이었을까요?
그림책이 출간된 해는 2005년.
꽤 시간이 지났지만, 그동안 이 장면에 아무런 문제제기가 없었다는 사실이 더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2023년, ‘정치하는 엄마들’의 목소리로 드디어 출고 중지 조치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는 묻고 싶습니다.
정말 그땐 맞았고 지금은 틀린 걸까요?
아닙니다. 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립니다.
그저 그때는, 침묵하고 순응하는 것이 미덕이라 여겨졌고,
제기할 수 있는 언어와 용기를 빼앗겼던 것뿐입니다.
이 장면을 보는 순간,
얼마 전 읽었던 브런치 연재 『엄마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딸』이 떠올랐습니다.
99세 노모의 마지막 삶을 지켜보는 딸.
‘장손 외아들’이라는 무게 아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계집애’로 자라며
사랑을 갈망하던 딸의 시선에서 써 내려간 글.
그 안에는 너무도 많은 여성이 공유하고 있는
사랑받지 못한 존재로서의 기억이 겹겹이 스며 있었습니다.
나도 그랬습니다.
내 또래 많은 여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천천히 데워지는 물속 개구리처럼,
남존여비의 공기가 집안과 사회 곳곳에 퍼져 있었고,
그 속에서 우리는 조용히, 그러나 깊게 스며든 상처를 안고 살아왔습니다.
“딸은 남의 집 갈 사람이니 아들이 잘나야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계집애.”
이런 말들이 어린 내 자존감을 조금씩 무너뜨렸고,
그 공허함은 오랫동안 사춘기와 성인이 되어도
내 안에 남아 상처받은 어린아이처럼 숨어 있었습니다.
그건 존재의 부정이었습니다.
살아있되, 없는 존재처럼 취급당한 시간들.
그렇게 우리 조상의 여자들은 말할 수 없는 '한(恨)'을 품고 살다 간 것이겠지요.
그 한은 유전되듯, 딸의 딸로 전해졌고
우리 세대의 본능처럼 뿌리 깊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대입니다.
말할 수 있고, 바꿀 수 있습니다.
상처를 깨달았기에
이제는 멈추고, 되돌아보며, 다른 길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제는 여성이
존재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는 시대입니다.
누군가의 아내로, 누군가의 엄마로 가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서 존엄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야 합니다.
물론 아직도 ‘그냥 그대로 살다가 죽고 싶다’고 말하는 조선시대 남자들이 주변에 존재합니다.
바꾸기 싫겠지요.
그동안 해오던 방식을 바꾸면,
불편이 생기고, 책임이 늘어나고, 평등해지면 설거지도 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바꿔야 합니다.
바꾸지 않으면, 또 다른 한을 우리 딸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게 될 테니까요.
오늘 그림책의 그림 한 장면이
나를 이토록 멀리 데려갔습니다.
아니, 이건 멀리 간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오랫동안 눌러 있던 기억과 감정이 이제야 꺼내진 것뿐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습니다.
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린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고치고 바로잡아야 합니다.
여자는 인간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에게도 머리채를 잡히거나, 존재를 부정당해선 안 됩니다.
이 당연한 진실이,
더 이상 그림책 속의 ‘자음 하나’로 은유되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