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5살 되던 해, 엄마는 여동생을 출산했다. 오전에 밭에 갔다가 배가 아파 집으로 왔다. 동네 아주머니한 명은 부엌에서 물을 데우고 한 명은 방으로 들어가서 엄마의 분만을 도왔다. 동네 아주머니가 방에 들어가면서 너희 엄마 동생 낳으려고 한다고 했다. 큰 비명소리도 없이 끙끙 앓는 소리를 하고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이렇게 기억을 잘하는 것은 반복 학습 덕분이다. 이 이야기를 엄마는 자주 하곤 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지 않고 딸을 낳았다는데 서운했다. 이제와서 아버지를 나쁘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때는 그랬다. 위로 오빠, 언니, 내가 있는 상황에서 다시 딸을 낳았다. 아버지는 방문을 드나들며 혀를 끌끌 찼다. 쓸데없는 가시나를 낳았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인 아버지는 아들 아닌 딸은 우리집 자손이 아니다. 시집 가버리면 남의 가문 사람이다. 그러니 아들 하나는 외롭우니 간절이 둘째 아들을 바랐다. 그런데 자꾸 딸을 낳으니 괜한 원망을 엄마에게 풀었다. 엄마가 무슨 잘못인가. 자식 먹여 살리느라 그 고생을 하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몸으로 아기를 낳았는데 남편은 눈을 흘기며 들락날락하니 가슴이 무너질 일이 아닌가. 엄마는 어린 핏덩이를 안고 젖을 물릴 때면 꺼억꺼억 울음을 삼키었다. 차라리 소리 내어 울기라도 했더라면 그 한이 풀렸을 것이다.
"엄마, 울지 마세요. 내가 딸이지만 커서 남자보다 더 엄마에게 효도할게요. 옆집 김 씨 아저씨는 아들이라도 일도 안 하고 술만 먹고 자기 엄마를 때리기까지 하잖아요.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될게요."
우리 동네에 김씨 아저씨가 있었다. 그 아저씨는 저녁 나절이 되면 술이 얼큰하게 취해서 마을 입구에서 부터 고함을 지르면 우리집 앞을 지나갔다. 뒷날에는 그집 할머니 얼굴에 멍이 들어 있거나 딸의 얼굴에 상처가 나있는 것을 보곤 했다. 어린 내 마음에 그 아저씨는 남자이지만 불효를 하는데, 나는 여자이지만 효도하겠다는 이야기다.
엄마는 5살의 딸이 등에서 얼굴을 기대고 하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어린 것이 어찌 이리 기특한 말로 위로를 하는가 싶었단다. 해산하고 얼마나 몸이 무거운가. 나도 아이를 낳아보니 엄마의 상황에 목울대가 꾸욱 올라온다. 엄마 역시 아들을 기다렸지 않았겠는가. 방바닥 재판을 해봐야 안다고 낳아보니 딸이라 서운한데 남편까지 죄인 취급을 하니 힘이 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하루라도 일하지 않으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우니 늘어난 식구에 앞이 막막했고 어린 딸이 엄마를 위로하니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엄마를 위로하고 있는 5살의 나그날의 상황과 감정과 이미지는 내 가슴 속에 깊이 새겨져있다. 아니 엄마는 그 이후로 친척들이나 동네 분들에게 수시로 그날의 이야기를 해서 더욱 기억이 강화되었다. 엄마는 나의 약속이 위로가 된 것 같았다. 또한 그 기억은 내가 힘이 들고 어려울 때 나도 모르게 두 손에 힘이 들어가서 불끈 지게 만든다. 나는 성공해서 엄마의 한을 풀어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