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 쓸모없음의 쓸모
누구에게나 시간이 비는 순간이 찾아온다. 약속도 없고, 해야 할 일도 모두 끝낸 뒤 남는 텅 빈 틈. 그 순간은 묘하게 마음을 허전하게 만든다. 바쁘게 달려온 일과가 멈추자마자 찾아오는 공백은 얽매인 사슬을 풀고 얻은 자유 같기도 하고, 동시에 ‘이제 무엇을 할까?’ 하고 작은 무언가를 찾게 만든다.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세상을 뒤흔들 만큼 의미 있는 일도 아니지만, 손이 심심하고, 입이 심심하고, 마음이 허전해서 붙잡게 되는 일들. 우리는 그것을 ‘심심부리’라고 부른다.
내 어린 시절 심심부리의 최애는 고무줄놀이였다. 고무줄을 기둥에 걸어놓고 뛰어오르던 그 단순한 놀이가 나의 오후를 꽉 채웠다. 혼자 해도 재미있었고, 친구들이 모이면 더욱 신이 났다. 아무 이유도 필요 없었다. 그저 고무줄 위를 뛰는 그 순간, 나의 다리는 튼튼해지고, 몸은 가볍게 날아오르는 듯했다. 돌이켜보면, 그 놀이가 단순히 심심함을 달래는 오락이 아니라 나의 몸을 단련하는 훈련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렇게 심심부리로 축적된 시간 덕분에 나는 동네에서 씨름을 가장 잘하는 아이가 되아 있었다. 결국, 아무 의미 없어 보이던 심심부리가 나를 강하게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은 뒤늦게 깨달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의 나에게 남은 심심 부리는 글쓰기다. 시간이 나면 나는 종종 펜을 들거나 키보드 앞에 앉는다. 때로는 낙서처럼 짧게, 때로는 일기처럼 길게 써 내려간다. 거창한 주제를 잡지 않아도 된다. 하루 동안 스쳐 지나간 장면, 문득 떠오른 생각, 감동적인 문장을 옮겨 적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대화를 나눈다. 글자는 단순히 종이 위에 남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그림자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어떤 날은 책장에서 오래된 수필집을 꺼내든다. 아무 쪽이나 펼쳐 무심코 읽어 내려가면, 그 속의 문장이 낯선 듯 새롭게 다가온다. 예전에 읽었던 책인데도, 지금의 내가 그 문장을 만나는 순간은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아, 같은 문장이라도 마음의 상태에 따라 이렇게 다르게 느껴지는구나’ 하는 깨달음은 또 하나의 작은 발견이 된다. 심심 부리는 단순한 시간 때우기가 아니라, 나를 변화시키는 문이 되어주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이런 심심부리들은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반드시 해야만 하는 굵직한 일정표를 끝내고 난 뒤, 평안한 시간 속에서 무심코 하는 이 작은 행위들이야말로 내 삶의 틈새를 단단히 꽉꽉 메워주었다. 의미 없어 보이는 순간들이 사실은 내 삶의 근육을 만들고 있었다.
시간이 나면 자동으로 끄적이던 문장들은 내 글쓰기에 대한 애정을 키워주었다. 그렇게 쌓인 습관 덕분에 나는 퇴직 후 수필집을 세 권 출간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심심부리에 불과했던 일이, 어느새 나를 세상에 드러내는 목소리가 된 것이다. 또한 아무 생각 없이 넘겼던 책장의 문장들이 내 사고의 뿌리가 되어, 내 말과 글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쓸모없어 보이던 것의 쓸모, 바로 그것이 심심부리의 진정한 힘이었다.
인생은 거대한 목표와 성취만으로 빛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자잘한 심심부리들이 삶의 균형을 이루고, 나를 조금씩 변화시킨다. 그 변화는 하루아침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되돌아보면, 내가 좋아해서 스스로 한 행동, 그 모든 사소한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어 왔음을 알게 된다. 고무줄을 뛰던 다리, 낙서처럼 흘려 쓴 문장, 무심히 넘겼던 책장들. 그것들이 바로 나를 이루는 작은 조각들이었다. 결국 마지막에는 내가 부담 없이 좋아해서 했던 시간들이 현상으로 내 앞에 펼쳐 있을 것이다. 나는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남고 싶은가 알고 싶으면 지금 내 심심부리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면 알 수 있을 듯하다.
나는 앞으로도 틈이 나면 글을 쓰고, 책을 펼치고, 사진을 정리할 것이다. 남들에게는 별것 아닌 심심부리일지 몰라도, 그것들은 나에게 삶을 이어주는 실이다. 심심 부리는 결코 하찮지 않다. 그것은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하고, 과거의 나를 단단히 이어주는 또 다른 이름이다.
돌아보면, 심심 부리는 언제나 나를 변화시켜 왔다. 단순히 시간을 흘려보내는 작은 행동이 결국은 나의 일부가 되었다. 앞으로의 심심 부리도 또 다른 발견으로 나를 이끌 것이다. 그 사소한 시간들이 모여 나는 계속해서 조금씩 자라날 것이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즐겁게, 가벼운 마음으로 또 한 줄을 적는다. 그 속에서 나는 또 다른 나를 만나고, 새로운 삶을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