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없이 가는 첫 여행

1. 추석여행, 문경새재

by 운아당

올해는 유난히 추석 연휴가 길었다.
시부모님 살아 계실 때는 명절마다 식구들이 모여들었고, 부엌은 늘 끓는 탕국 냄새와 각종 나물, 부침개의 음식 냄새로 가득했다. 여자들은 앉을 틈 없이 움직였고, 웃음과 한숨이 뒤섞인 호흡이 온 집 안을 채웠다.
여전히 대가족 안에서 남자들은 앉아 술잔을 기울였고, “명절에 뭐 할 일 뭐 있냐”는 한마디로 아내들의 수고를 흘려보내곤 했다.

어른들이 떠나신 뒤, 작년부터는 각자의 집에서 명절을 보내기로 했다. 오백 년 내려온 전통과 문화가 이렇게 쉽게 변할 수 있구나, 놀랍기도 하고 아직은 조금 어색하다.
그래도 마음 한편은 분명 가벼워졌다.


명절의 짐이 사라지자, 자연스럽게 우리를 위한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하는 생각이 모였다.

그래서 우리는 10월 6일부터 8일까지 경상북도 지역을 여행하기로 했다.
딸들이 “엄마, 이번엔 우리끼리 가요”라며 제안했다. 남편과 사위는 각자의 일로 동행하지 못해, 처음으로 여자들만의 여행이 되었다. 평상시 같으면 포기했을 여행을 강행군한 것이다.


약간의 두려움과 설렘이 동시에 밀려왔다.
둘째 딸이 일정을 세웠다. 이 아이는 기획도 꼼꼼하고 운전도 능숙하다.
그렇게 모험 같던 추석여행이 시작되었다.

추석 전날 저녁, 첫째 딸이 준비한 음식으로 온 가족이 모여 명절의 정취를 냈다.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고, 손주들이 태권도 품새와 영어 스피치를 선보였다.
그 웃음소리 속에서, 명절의 분위기를 한 껏 내었다.


다음 날 아침, 첫째 딸이 시댁 인사를 마치고 11시 반에 합류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오전 11시경, 나는 김밥을 도시락에 담아 차에 올랐다.
목적지는 문경새재, 영주 부석사, 포항 호미곶, 이 세 곳으로 정했다.
그중 첫 행선지는 문경새재였다.

둘째가 운전대를 잡았다.
온 가족을 태우고 처음 가는 길이라 긴장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조수석에서 사과, 쥐포, 사탕을 건네주며 졸음을 쫓고, 내비게이션의 화살표를 함께 살폈다.
뒷좌석에서는 손주들의 재잘거림이 끊이지 않았다.
끝말잇기, 속담 맞히기, 사자성어 이어가기… 그 웃음만으로도 길은 이미 여행의 리듬을 타고 있었다.

비가 오락가락했고, 차가 밀려 도착은 늦었다.


예상시간 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지만 문경새재의 입구에 다다르자 공기가 달라졌다.
안개에 젖은 산이 부드럽게 몸을 풀고, 이슬 머금은 나무 냄새가 깊게 배어 있었다.

문경새재는 백두대간 조령산 마루를 넘어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영남대로의 가장 높은 고개다.
예로부터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들다’ 하여 새재(鳥嶺)라 불렸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한양과 영남을 잇는 관문으로, 수많은 선비와 상인, 병사, 그리고 유배인들이 이 길을 걸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중요한 사연을 담고 이 길을 넘나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갔다. 길을 걷다 보면, 그 모든 이야기가 산의 숨결 속에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이 길은 단순한 통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시대와 시대를 잇는 ‘시간의 실핏줄’ 같은 곳처럼 느껴졌다.
추석 당일이라 전동차가 운행하지 않았다. 멀리 까지 올라가 보지는 못하고 세트장 구경을 했다.

양반집과 평민의 집은 빈부의 차이가 많이 났다.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길 끝자락에서 문득 뒤돌아보았다. 산허리를 감싸는 안개가 흘러가고 있었다. 그 흐름이, 인생의 시간 같았다. 잠시 머물다, 결국 흩어지는.

예상보다 늦게 도착해 온천에는 가지 못했다. 대신 문경의 약돌 돼지갈빗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숯불 냄새와 따뜻한 국물이 하루의 피로를 녹였다. 숙소인 페트로 호텔에 도착해 짐을 풀자 손주 둘은 방 안을 뛰어다니며 여행의 흥분을 만끽했다.

샤워를 마치고 누워 있는데, 손녀가 편의점에 다녀오겠다며 컵라면을 사 왔다.
결국 어른들은 먹지 않고, 손주 둘이 나란히 앉아 라면을 후루룩 먹으며 웃었다.
그 웃음이 이 여행의 가장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소리였다.


창밖에는 조령산의 어둠이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오늘의 걸은 길이 나를 조금 더 느리게, 조금 더 너그러이 만드는 듯했다. 삶도 어쩌면 이런 걸음으로 가야 하는 게 아닐까. 몇 일 느긋하게 이 숲속의 나무와 새들과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이들이 있어 그럴 수 없는 일이고 다음에 꼭 다시 와야지 하는 다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