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살아낸다는 것

13. 출애굽기를 읽고 묵상하며

by 운아당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본성이 마주하는 이야기


출애굽기는 한 민족의 탈출 기록이기 전에,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본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마주하는 이야기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이스라엘 백성 곁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모습이 그리 낯설지 않다는 사실에 마음이 조용히 무거워진다.


하나님은 고통의 현장으로 내려오신다


출애굽기는 고통에서 시작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신음을 들으셨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애굽의 압제 아래서 흘린 눈물과 탄식은 허공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내가 분명히 보았다, 내가 들었다, 내가 내려왔다”고 말씀하신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본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고통의 현장으로 내려오시는 분이다. 구원은 인간의 결단에서 시작되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에서 시작된다.


출애굽은 누구의 선택이었는가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출애굽은 왜 일어났는가. 이스라엘 백성이 원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계획이었는가.
이스라엘은 고통 속에서 부르짖었지만, 그 부르짖음은 ‘약속의 땅으로 가고 싶다’는 신앙 고백이라기보다, 당장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절규에 가까웠다. 그들은 하나님을 깊이 알지 못했고, 자유의 의미도 분명히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계획 안으로 받으신다.
출애굽은 인간의 요청에 하나님이 즉흥적으로 반응하신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성취였고,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이루어지는 구속의 역사였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원했기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부르시기로 뜻하셨기 때문에 시작된 여정이었다.

이 사실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이스라엘은 준비된 민족이 아니었고, 성숙한 신앙 공동체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셨고, 데리고 나오셨다. 출애굽은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계획을 움직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인간의 삶을 끌어안은 이야기다.


자유를 얻었으나 마음은 여전히 종으로 남다


그러나 홍해를 건넌 이후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은혜보다 인간의 본성을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기적은 분명했다. 바다는 갈라졌고, 애굽의 군대는 물에 잠겼다. 찬양은 입에서 터져 나왔고, 승리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감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물이 없자 원망이 시작되고, 먹을 것이 부족하자 “애굽이 더 나았다”는 말이 흘러나온다. 자유를 얻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종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눈에 보이는 신을 만들고 싶어 하는 인간


특히 출애굽기에서 반복해서 드러나는 인간의 모습은,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붙들고 싶어 하는 갈망이다.
모세가 산 위에 오래 머물자, 백성은 불안해진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과 함께 계셨지만,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신뢰는 빠르게 흔들린다. 결국 그들은 금을 모아 송아지를 만든다.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신을 스스로 만들어 섬기기 시작한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기다리기보다, 지금 당장 확인할 수 있는 무언가를 세우고 싶어 한다.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보다, 눈앞의 안정과 확실함을 더 신뢰한다. 인간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을 신으로 삼을 때 마음이 편해진다. 금송아지는 단지 우상이 아니라, 불안을 견디지 못한 인간의 고백이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부르심


반대로 하나님은 끝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을 믿고 따르라고 하신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인간의 이해와 소유의 틀 안에 갇히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들린다. 하나님은 형상으로 축소될 수 없고, 손에 쥐어질 수 없는 분이시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보이는 것보다 말씀을 신뢰하는 선택이 된다.


광야, 믿음을 배우는 자리


광야는 그래서 더 힘들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래와 돌뿐이고, 내일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먹이시고, 구름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다. 하나님은 백성이 눈에 보이는 신을 만들기보다, 매일의 삶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원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통제당하는 신을 만드는 데 있지 않고, 관계 속에서 신뢰받는 하나님이 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애굽기가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연약함에 의해 좌절되지 않기 때문이다.
백성이 원망할 때 하나님은 만나를 내리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신다. 금송아지를 만들고 등을 돌릴 때에도, 하나님은 언약을 끊지 않으신다. 징계는 있었지만, 포기는 없었다.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애굽에서 꺼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빚어 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광야를 걷는 우리의 질문


광야는 그래서 중요한 장소가 된다.
그곳은 인간의 본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자리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오래 머무는 자리다. 하나님은 빠르게 데려가시기보다, 오래 걷게 하신다. 목적지보다 관계를 먼저 다루시기 때문이다.

출애굽기를 읽으며 나는 묻게 된다.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믿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내 손에 쥘 수 있는 무언가를 금송아지처럼 세우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에도, 여전히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심을 믿고 있는가.


“보이지 않아도, 나는 여기 있다”


출애굽기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한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구원과 동행을 향해 있고, 인간의 본성은 여전히 흔들리지만, 그 흔들림마저 품고 끝까지 이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그리고 광야 한가운데서 하나님은 여전히 조용히 말씀하신다.
“보이지 않아도, 나는 여기 있다.”


자유를 살아낸다는 것


사슬이 끊어졌을 때
우리는 자유라 불렀다.
등 뒤에서 애굽이 멀어질수록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광야에 들어서자
자유는 갑자기 무거워졌다.
지켜 주던 명령도 없고
대신해 주던 주인도 없고
선택해야 할 하루가
매일 우리 앞에 놓였다.


노예였을 때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고
결정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의심은 허락되지 않았다.


자유는
책임을 데리고 왔다.

우리는 바다를 건넜지만
마음은 여전히
애굽의 그늘을 찾았다.
채찍은 사라졌지만
두려움은 남아
“그때가 더 나았다”고
입술은 쉽게 말해 버렸다.


하나님은 묻지 않으신다.
“왜 아직도 흔들리느냐” 대신
오늘의 만나를 내려 주신다.
하루치만 주시며
내일을 맡기라고 하신다.


자유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아도
말씀을 붙들고 걷는 것임을
광야에서 우리는 배운다.


자유는
한 번 얻는 것이 아니라
매일 선택하는 것이며
기적보다 오래 걸리고
구원보다 더 많은 신뢰를 요구한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은 서두르지 않으신다.
우리를 데려가시기보다
우리와 함께 걸으신다.


자유를 주신 분은
자유를 살아낼 수 있도록
끝까지 동행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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