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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오 Apr 01. 2022

위기는 여러 얼굴을 하고 다가온다, 민화 도전기(3)


 

 2급 자격증 맨 마지막 작품인 궁모란도는 두 점을 동시에 작업하는 데다가 그림 크기가 문짝 절반만 해서 작업하기 수월한 작품은 아니었다. 겨우 내내 상체를 잔뜩 쪼그리고 집중을 했더니 결국 탈이 났다. 머리를 감으려는데 팔이 안 올라갔다. 이거 좀 그렸다고 이 난리다 진짜. 가지가지한다고 생각하며 병원으로 달려갔다. 한동안 침도 맞고 추나 치료도 받으면서 작업 금지형에 처해졌다. 이번 위기는 통증이라는 얼굴로 나타났지만... 나는 오기가 생겨 그만 1급 자격증에도 도전하게 되었다. 못 먹어도 고!  




 하지만 1급의 첫 위기는 물고기 얼굴로 나타났다. 첫 작품은 약리도였다. 약리도는 파도 위를 힘차게 퍼덕이는 잉어 두 마리가 마치 승천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출세나 시험 합격의 소망도 담겨 있고 다복이나 다산과 같은 생명과도 연결이 되며 자유로움을 나타낸다고도 한다. 물고기가 싫은 것은 아닌데 물고기를 그리는 것은 참 버거웠다. 정이 안 붙으니 뒤편의 산이나 물결도 물 조절을 잘못해서 엉망이고 처음부터 다시 그리는 것도 싫어서 어떻게든 한 번에 끝내려고 붙잡고 결국 해냈다.

약리도 그림 과정

 그러나... 시험을 코 앞에 두고 이미 그려둔 작품들을 정리하다가 하필 약리도에 먹을 떨궜다. 하단 물결 사이 밝은 부분에 새끼손가락만 한 얼룩이 진하게 생겼다. 다시 그릴 시간도 안될뿐더러 자격증을 제치면 제쳤지 약리도는 다시 그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먹으로 얼룩진 완성품이더라도 시험 과정에서 양해를 구하는 것이 맞다는 판단이 들었다.

 

 1급 시험은 내가 그린 총 네 장의 그림을 쭉 붙여놓고 실물 그림으로 심사를 받는 형태였다. 시험 전 날에 심사위원 분들께 내 실수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지 미리 대답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 준비가 무색하게도 내 그림의 장점만 봐주시고 얼룩은 마치 보이지 않는 것처럼 넘어갔다.

 나는 시험을 무사히 마치고 나오면서 반성했다. 대체로 자신이 좀 없는 편이어서 내 성취보다는 부족함을 우선 떠올리는 사람이라고 생각은 했었는데 그걸 확인사살당한 기분이었다. 나는 내가 완성한 수많은 비늘들과 붉은 태양과 잉어의 수염을 외면하고 오로지 얼룩만 생각했다. 엉망인 건 내 작품이 아니라 나였던 것이다.

 

 


(병원에서 경고 먹고 허리 펴고 작업하려고 각도 조절되는 책상을 구매했더랬다)

 두 번째 작품은 화조도

화? 그렇다. 꽃이다. 내가 좋아하는 꽃. 이번 화조도에는 국화와 석류꽃, 석류까지 예쁘고 화려해서 좋았다.




세 번째 작품은 기명도

앞선 책가도도 곧은 선이 많아 뭐 재미가 없다 어쩌고 핑계 대며 궁시렁거리긴 했는데... 사실 기명도도 재미가 없었다. 약간 이런 정물 느낌이 나는 그림을 재미없어하는 것 같다. 나는 살아있는 게 좋단 말이야! 심지어 기명도는 꽃도 엄청 재미없었다. 조화 느낌. 심지어 최종 완성 사진도 안 찍어둬서 맨 오른쪽 그림도 최종본이 아니다. 내가 다른 취미들은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제법 썼는데 민화는 아직 선생님 언급을 하지 않았구나! 민화도 정말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꽃 그림의 사랑스러움을 알기 전에 고꾸라졌을 거다. 기명도는 특히 선생님의 따뜻하고 인정 넘치는 관심이 있어서 끝까지 할 수 있었다. 뭘 그리든 우쭈쭈 모드 장착! 나는 계속 따라갈 수밖에.





마지막.. 대망의 십장생도

 해, 구름, 산, 물, 소나무, 거북, 사슴, 학, 복숭아, 불로초 등 열 가지 불로장생 상징들이 나온다. 이맘때쯤에 엄마가 갑상선 암으로 수술을 받으신 직후라 이 십장생도를 그릴 때 뭔가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그렸던 것 같다. 내가 민화를 처음 배우러 갔을 때 목표가 복숭아랑 고양이를 그리는 것이었는데 이 십장생도야말로 나를 위한 그림이었던 거다. 복숭아가 정말 귀엽고 소담하고 탐스럽게 중앙에 자리한다. 진짜 너무 마음에 딱 들게 잘 그려져서 엄청 자랑하고 싶다. 그리고 고양이는 없지만 고양이를 그리기 위한 털치기 스킬이 사슴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그렇다 나는 이 털치기를 위해 십장생도까지 달린 것이다.


그리고 1급 자격증도 당당하게 땄다!



그래서 복숭아랑 고양이는 그렸냐고? 둘 다 미완성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자격증까지 따고 한동안 작업을 못했다. 해야 할 동력을 잠시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소원하다가 기다리던 봉준호 감독님의 기생충을 봤다. 보자마자 집에 와서 기암괴석과 복숭아가 어우러진 선을 따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낙서가 아닌 제대로 된 그림으로 영화 보고 난 다음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었던 거라 스스로 기특하게 느껴졌다. 물론 내가 처음으로 모작이 아닌 것에 도전한 것이니 그다지 완성도가 높지 않아서 공개를 하지 않겠지만 적당한 때가 오면 완성도를 높여서 다시 작업해보고 싶다. 고양이도 마찬가지. 좋은 도안을 만났는데 혼자 하는 작업이니 많이 어렵다.   




 민화는 끝나도 끝난 것이 아니다. 색을 더 얹고 차분하게 마르길 기다렸다가 종이가 헤지지 않을 만큼 색을 더 얹어본다. 내 마음에 드는 느낌이 날 때까지. 석류를 노란색으로 칠하는 사람도 있다. 모작이 기본이지만 나의 그림이므로 색깔을 반드시 같게 할 필요도 없다. 이게 바로 민화의 매력이다. 나의 민화도 끝나지 않았다. 아직도 얹을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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