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해지지 않기
나는 헬스장을 두 군데 다닌다. 아는 사람 없이 혼자 운동할 수 있는 곳, 그리고 이제는 아는 얼굴이 꽤 있는 가깝고 편안한 곳. 가까운 헬스장에 가더라도 혼자 할 운동만 하고 나오는 편이긴 하다. 어젠 가까운 헬스장엘 갔다. 평소라면 프리웨이트 존 구석에 숨어서 정해진 운동만 하고 나왔겠지만, 어제는 목표가 분명했다. 목표한 운동을 끝내면, 지난번 실패했던 벤치프레스 50kg을 다시 마주하는 것. 하지만 혼자 바벨을 뽑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 안전바도 없고. 지난번의 무거움에 확실히 쫄긴 했나 보다.
등 운동을 마무리하고, 벤치로 갔다. 무게를 적당히 꽂고 워밍업을 한 후 50kg를 세팅했다. 혼자 들려고 해보니 역시 쉽지 않았다. 어, 하지만 저번보단 좀 들만한데, 생각도 들었다. 그때 주변을 훑으니 수업 중인 선생님을 발견. 나는 멀찍이 서서 그의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시계를 보니 종료까지 10분 남짓 남은 상황. 평소의 나였다면 다음에 기회에 하지, 하며 돌아섰을 텐데 어제는 이상하게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1분, 2분, 시계와 선생님의 수업 광경을 번갈아 보았다. 마침내 수업을 마친 선생님이 회원과 마무리 인사를 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가갔다.
“선생님, 기다렸어요. 저 이거 한 번만 잡아주세요.”
"이게(50kg) 돼요..?"
"아니요. 한 번 해보려고요! 시간 되시면 도와주실 수 있나요?"
내 입에서 나온 말인데도 생경했다. 다른 이에게 목적을 가지고 도움을 요청하는 내 모습이 스스로도 당혹스러웠다. 감사하게도 선생님은 흔쾌히 벤치 뒤로 와 자리를 잡았다.
벤치에 누워 바벨을 잡았다. 바벨을 잡고 올리는 순간, 선생님의 얼굴이 시야에 꽉 찼다. 시선을 어디에 고정해야 할지 몰라 그 얼굴 근처 안전한 목표지점을 찾았다. 바벨을 받쳐 든 그의 앞 머리카락이 보였다. <공포의 외인구단>에 나오는 까치의 앞머리 같은. 나는 그 앞머리 끝 부분에 시선을 고정했다.
“하나, 둘, 셋!”
바벨을 올렸다. 50kg은 여전히 묵직했다. 1개는 보조를 받아 무게를 한 번 느껴보았고, 기세를 몰아 5개까지 시도했다. 하지만 2.5개째부터는 팔의 힘이 쑥 빠졌다. 팔꿈치가 떨리며 바벨이 가슴 쪽으로 주저앉으려 했다. ‘못 해, 이건 안 돼’라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는 찰나, 선생님이 바벨을 강하게 끌어올렸다. 사실상 3회부터는 내가 아니라 그의 전완근이 다 들었다. 세트가 끝나고 바벨이 랙에 걸리자 선생님은 “우와, 해내셨어요!”라고 했지만, 아닌 걸 안다고. 민망함에 하하 웃으며 도와주셔서 감사하다, 주말 잘 보내시라, 인사를 건네고 벤치를 빠르게 빠져나왔다.
짐을 챙겨 헬스장을 나오는데 자꾸만 내가 내뱉은 “도와주세요”라는 말이 마음 속에 맴돌았다. 50kg을 자력으로 들지 못했다는 실망감보다, 기어이 그 말을 하고야 만 나 자신에게 더 놀랐다. 남에게 폐 끼치기 싫고, 심지어 부탁하는 건 죽기보다 싫다. 그런데 고작 무게를 들어보겠다고 망설임 없이 도움을 요청했다. 수업 끝나는 순간에 저 선생님을 낚아채겠다, 뚫어지게 상황을 집요하게 주시하면서. 절대 나다운 상황은 아니었다.
자립에 대한 강박, 문제는 스스로 통제하고 해결해야 한다는 고집, 약점을 보이거나 도움을 청하는 것은 무능함의 증거라고 믿어왔던 결벽증 같은 것들. 사회생활에서, 모든 삶에서 나는 늘 혼자서 잘 해내는 사람이어야만 했고 지금도 그래야 한다.
그런데 고작 벤치프레스가 뭐라고, 그게 10분 사이에 내 고집을 꺾었다. 지금의 내 힘으로는 메울 수 없는 그 무게의 간극 앞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강박에 살짝 균열이 갔다. “기다렸다”는 말은 사실 “나 약해, 도와달라”는 고백이었고, 그건 내가 평생을 두고 절대로 하지 않는 말 중 하나였다. 며칠 전 피티 선생님이 그랬다. 벤치프레스 하다가 깔리면 도와주세요, 소리치면 된다고. 그 말을 들었을 때도 나는 바로 받아쳤다. '그런 말을 어떻게 하나요, 그리고 저는 혼자서도 잘 나올 수 있는데요.'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50kg을 자력으로 계속 들지 못한단 사실보다, 내가 타인에게 손을 내밀 수도 있다는 사실이 혼란스럽게 다가왔다. 이건 성장인지 퇴보인지. 혹시, 이렇게 강박의 무게를 조금씩 덜어내도 되는 걸까. 삶의 무게를 마주하려면 타인의 앞머리를 쳐다보며 그들의 전완을 빌려야 할까. 빌려도 되는 걸까. 아니면 다시 정신을 다 잡고 깔리더라도 혼자 들어내야 할까. 한참을 고민했다. 해가졌고, 하루를 넘겼다. 그리고 결론을 냈다.
깔려도, 나는 혼자서도 잘 나올 수 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깔릴건데, 어쩔 수 없이 혼자서 잘 나와야 한다,가 맞겠다. 그러니 도움을 요청했던 어제의 나는 없었던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