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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 스트리트 : 프롬 퀸

시간은 금이라던뎁쇼. 아껴드릴게요.

by 원일


얼마 전 피어 스트리트 파트 1을 보고 꽤 긍정적인 글을 썼다. 그만큼 이번 『피어 스트리트: 프롬 퀸』에 거는 기대도 컸다. 하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아니, 맥이 탁 빠지는 영화였다.



해외에서는 끊임없이 리부트 되고 재해석되며 꾸준히 살아 있는 장르지만, 한국에서는 유독 환영받지 못하는 게 슬래셔다. 《스크림》,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같은 영화들이 유행하던 시절엔 전 세계적으로 열풍이 불었고, 한국에서도 그 반사효과로 프랫팩 무비 분위기의 슬래셔가 몇 편 시도되긴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시대의 ‘반짝’ 일뿐이었다. 그 이후 슬래셔는 국내에서 거의 20년 가까이 ‘뻔하다’, ‘식상하다’, '촌스럽다’는 이유로 외면받아온 장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슬래셔 장르를 좋아한다. 아니, 단순히 좋아하는 걸 넘어 편애한다. 낡고 진부한 공식도 좋다. 그 공식을 비틀거나, 정면으로 받아들여 더 설레게 만드는 시도라면 더욱 반갑다. 그중 ‘프롬 퀸의 비극’ 같은 설정은 오히려 기대감을 증폭시킨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모든 기대를 무기력하게 뭉개버렸다.


고전 슬래셔의 향수도, 현대 공포 영화의 참신함도

단 하나도 제대로 건드리지 못한 채, 애매함만을 남겼다.



어떤 부분이 아쉬웠냐고? 사실 너무 많다. 하지만 요약하자면 간단하다. 살인마의 동기(모티베이션)는 뻔하고, 범행 장면은 긴장감이 없고 주변 인물들의 반응은 심심하다. 공포영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과장된 연출, 그 호들갑조차도 없다. 그게 클리셰라면, 이 영화는 그 클리셰조차도 감당하지 못한 셈이다.


심지어 피해자들은 거의 유서라도 써놓은 듯, 순순히 당해준다. 이쯤 되면 스릴은커녕, 무기력감만이 남는다.

아무리 장르적 오마주를 내세운다 한들, 기본적인 긴장감이 빠진 슬래셔는 그저 빈 껍데기일 뿐이다.


물론, 원작이 있고, 영화가 속한 피어 스트리트 속의 셰이디 사이드 유니버스라는 세계관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설정이 있다고 해서 구린 연출까지 납득하라는 건 무리다.

이 영화는 보는 내내 눅눅한 장마철의 지하철에 냄새꼬를 가둬 방사한 기분만큼 쉰내 나고 구린 연출이었다. 공포를 느끼기 전에, 공기 자체가 불쾌해지는 경험이랄까.

아무리 ‘B급 감성’이나 ‘올드 슬래셔에 대한 오마주’라고 해도 그걸 잘 해내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매우 강력한 정리입니다. 마지막 단락으로 쓰기에 딱 좋은 문장들이고, 지금의 감정과 비판의 날카로움도 잘 살아 있어요. 전체 리뷰의 마무리 느낌을 살려서 아래와 같이 다듬고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확실히 failed에 가깝다. 80년대 호러를 차용했다는 말 자체는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그 시절의 정서와 질감을 잘 살려낸다면, 지금 시대에 더 새롭고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자산이다. 하지만 그때의 허술함은 기술적인 부분이 부족해도 노력이 들어간 매력이었고, 지금 이 영화의 엉성함은 그저 ‘조악함’에 가깝다. 그 시절 영화들은 기술적으로 부족해도 장르에 대한 진심과 감정의 강박,

혹은 그 시절만의 날것의 에너지가 있었다.


하지만 『피어 스트리트: 프롬 퀸』은 그 어떤 감정도, 에너지도, 심지어 욕망조차 느껴지지 않는 그냥 ‘흉내 내기’에 그친 작품이다. 장르적 사랑 없이 장르를 소비할 때

그 결과물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이 영화는 명확하게 보여준다.


특히 성조기 수영복 씬은 최악이었다. 그건 그냥, 알고 싶지 않은 아재의 고상한 취미를 본 기분이다. 뭣 같았다는 표현이 가장 맞는 것 같다. 보는 내내 불편했고, 그 장면은 도대체 왜 들어갔는지조차 모르겠다. 무엇보다 굳이 이렇게까지? 우범 지역 동네의 프롬 퀸이 미스 유니버스라도 되는 줄 알았다. 프롬 퀸이라는 개념에 과하게 집착한 연출은

슬래셔 장르의 본질이 아닌 표면적인 클리셰의 과잉 소비로만 느껴졌다.


넷플이라서, 그리고 피어 스트리트를 좋게 봤기에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과감하게 스킵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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