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좋은비 Mar 12. 2016

24. 바보같이, 네가 떠오른 순간



 3월의 저녁은 언제나 부산하다. 새로운 조직이 세팅됐다는 이유로, 누군가 진급했다는 이유로, 누군가는 퇴사한다는 이유로, 매일 저녁이 회식의 연속이다. 온전한 정신으로 집에 들어오는 날도 드물뿐더러, 집에 있을 시간도 충분히 않다. 자연스레 혼자 사는 싱글남의 모든 집안일들이 마치 미뤄둔 숙제처럼 차곡차곡 쌓여간다.

 다시 돌아온 토요일엔 아무 약속도 잡지 않았다. 아침에 잠깐 운동을 다녀와서 하루 종일 집안일을 해치웠다. 아직 조금 춥지만, 창문을 활짝 열고 청소기도 돌리고, 바닥도 닦고, 화장실 청소도 했다. 책상 위에 널브러진 책들과 잡지를 치우고, 티비와 모니터 위에 쌓인 먼지를 닦고 나니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이대로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식기와 냄비들을 올려놓는 건조대가 텅텅 비어있다. 혹시나 아직 안 쓴 그릇이 있는지 찾아봤지만 허사였다. 매번 '설거지하고 밥 먹으면, 또 설거지거리가 생겨서 싫은데...'라는 핑계로 이 것만 먹고 꼭 설거지 해야지 마음 먹지만, 밥 먹고 나면 움직이기가 싫어진다. 그렇게 쌓인 설거지가 한가득이었다.


'어쩔 수 없지.'


건조대에 혼자 외롭게 놓여있던 고무장갑을 끼고, 수세미를 들어 물을 튼 그 순간,


"으악!"


고무장갑 손가락 끝에 구멍이 생겼는지 차가운 물이 스물스물 들어왔다. 고무장갑에 물기가 베었을 때의 그 찝찝한 느낌이란! 어쩔 수 없이 고무장갑을 뒤집어 벗고, 손을 씻고 수건으로 슥슥 닦았다. 다이소에 가려면 20분은 걸어가야 되는데, 이 밥 한 끼 먹자고 그렇게까지 고생하긴 너무 귀찮았다.


(두 번째) '어쩔 수 없지. 하아.'


맨 손에 수세미를 움켜쥐고 세제를 꽉 찼다. 그리고 설거지를 시작하기 위해 그릇을 드는 순간, 갑자기 '퍽, ' 하고 눈물이 차올랐다. 진짜, 진짜 바보같이 네가 떠올랐다.








"어? 왜 고무장갑 안 껴?"


그녀의 집에 놀러 가서 밥을 다 먹고 같이 설거지를 했다. 내가 세제를 묻혀서 그릇을 닦고 그녀가 헹구는 일을 했다. 그런데 고무장갑에 한 짝 더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걸 끼지 않았다.


"고무장갑 끼고 하면, 세제 찌꺼기가 남았는지 안 남았는지 모르잖아."


"야, 주방 세제는 물에도 다 잘 씻겨~ 맨 손으로 하면 손에 주부습진 생긴다!"


"괜찮아, 괜찮아. 나 항상 이렇게 해왔어."


"안 괜찮아, 안 괜찮아. 이제 내가 잡을 손인데 안된다!"


그녀는 한사코 고무장갑을 끼지 않았다. 설거지가 다 끝나고 나는 뻣뻣해진 그녀의 손을 잡고 와서 핸드크림을 잔뜩 짜 발라주었다.


"으이그, 니 이제 설거지하지 마. 내가 다 할게."


"그럼 오빠도 헹굴 땐 맨손으로 해~ 세제 찌꺼기 남으면 어쩔라고..."


"안 죽어요~ 안 죽어~"



그 이후로 우리가 함께 밥을 먹을 때, 항상 그녀가 요리를 하면 내가 설거지를 했다. 가끔 그녀가 설거지를 할 때엔 여전히 맨 손으로 그릇을 헹궜다. 나는 그게 참 싫었다. 그래서 얼른 내가 고무장갑을 끼고 끼어들곤 했다.






정말 오랜만에 맨 손으로 설거지를 하려니, 그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와 헤어지고 네 번의 계절이 흘러, 다시 봄이 왔는데.

이제는 정말 다 괜찮아졌다고,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깊이깊이 숨어있던 기억 하나가 다시 떠 오른 것이다.




(주부습진 걸린다고, 바보야.)





이게 뭐야, 정말.

남들은 무슨 "네가 좋아하는 에스쁘레소 마끼아또를 마시며", 혹은 "너와 자주 가던 연남동" 뭐 이런 간지 나고 그럴싸한 계기로 헤어진 옛 연인을 떠올리는데,

내가 쓰고 있는 글이지만, 정말 맨손으로 설거지하다가 떠오르는 건 멋알탱이 한 개도 없다.


그래도 뭐, 다행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전에 스스로 기억조차 할 수 없던, 마음속 깊이 있던 너의 흔적 하나를 이렇게 지울 수 있어서.

이래서 오래 연애를 하면, 그에 비례해서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단 말이 맞나 보다.



이렇게 바보같이 왈칵 눈물을 쏟아내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일 거야.

다음번에 맨 손으로 설거지할 땐,

아무렇지 않게 콧노래를 부르며 그릇을 닦고 있기를.



죽을 만큼 괴로운 순간은 있지만,

영원히 고통스러운 삶은 없다.



이제 정말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슬슬, 이 글들을 끝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


브런치북 대상 출간, <서른의 연애>

매거진의 이전글 23. 외로울 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