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휴가 때 부모님과 함께 제주도에 가기로 했다. 요즘은 카드 결제가 일상화되어 있지만, 혹시나 있을지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ATM에 돈을 뽑으러 갔다. ATM기 앞에 서서 메뉴를 선택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투두둑하고 떨어졌다. 3년 전, 전 여자친구와 함께 설악산에 갔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더 젊었을 때가 아니면 언제 해보겠냐는 심정으로, 여자친구와 함께 설악산 등산을 하기로 했다. 대피소와 숙소 예약, 그리고 가는 차편은 내가 부담하고 나머지는 여자친구가 부담하기로 하였다. 1박 2일의 고된 등산을 마치고 이틀 째 저녁에 백담사 쪽으로 내려왔다. 식당에 들어가 꿀맛 같은 저녁을 먹고 여자친구가 계산을 하려고 하였다. 문제는 여기부터였다. 주인 할머니가 카드 결제는 안되고 현금만 가능하다고 하셨다. 그런데 여자 친구가 가지고 있는 현금이 1만 원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내가 가지고 있던 현금과 합쳐보아도 저녁 식사 값을 다 지불할 수가 없었다. 3천 원 정도가 비었는데, 할머니에게 죄송하다고, 죄송하다고, 꼭 뽑아서 드리겠다고 사정하고서 식당을 나왔다. 그리고 백담사 버스정류소에 가서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표를 끊으려 하는데, 아뿔싸, 여기도 카드 결제가 안된다는 것이다. 은행은 커녕, 현금 인출기를 찾기 위해서는 버스를 타고 한참을 나가야 하는데 그 버스표를 끊을 현금조차 없었다.
숙소로 돌아온 나는 여자친구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준비성이 없을 수 있냐고. 시골로 여행 오는 거면 당연히 현금을 넉넉히 뽑아와야 되는 것 아니냐고. 안 그래도 어쩔 줄 몰라하는 여자친구를 앞에 두고, 나는 표정을 싹 굳히며 인정사정없이 그녀를 다그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여자친구 부모님께 연락해서 터미널 관리 아저씨 계좌로 이체를 하여 서울로 올라오는 표를 구할 수 있었다. 힘든 산행에 둘 다 지쳐있는 상황. 나는 여자친구를 감싸주지 못하고, '네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다며 더 매몰차게 몰아붙였다.
여행을 위해 현금을 뽑다 보니 그때 일이 떠올랐다. 너무나 후회스러웠다. 연애를 하면서 여러 가지 일들로 많이 싸우곤 했지만, 그때 일이 가장 미안했다. 그때 꼭 그래야 했을까, 그때 내가 더 감싸주지 못했던 것일까.
나는 왜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욱 잔인했던가.
꼭 그때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쩌다 여자친구가 약속에 늦을 때면, 거의 한 시간 정도는 표정 굳히고 싸늘하게 대했던 나였다. 나 역시 수 많은 실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여자친구에게 더 엄격하고, 매서웠다. 친구들에게는 넉넉하고 인심 좋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ATM기 앞에서 바보같이 눈물을 흘리고서는 많은 생각을 했다. 다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리하지 않겠다고. 사랑하는 사람의 곤란은 바로 내 것으로 여기고 함께 아파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두 사람이 '하나'가 되었다는 말이 수사적인 표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되는 사랑을 하고 싶다. 그 사람의 기쁨은 있는 그대로 나의 기쁨이 되고, 그 사람의 아픔은 있는 그대로 나의 아픔이 되는.
그러면 내가 그 사람에게 잔인해질 수 있겠는가. 그의 실수가 곧 나의 실수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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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대상 출간, <서른의 연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