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e #1.
평소에 드라마를 찾아서 보는 편은 아니다. 다만 가끔 고향에 내려가면 엄마 옆에 앉아서 그간 밀렸던 드라마들을 한꺼번에 따라잡곤 한다. 요즘 가장 핫한 드라마는 역시나 <아이가 다섯>인 것 같다. 종종 SNS를 통해서 성훈과 신혜선(♡)의 애정씬을 본 적은 있지만, 제대로 드라마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 드라마, 중간에 끼어들기엔 난이도가 높다.
(엄마)
"쟤랑 쟤랑 서로 좋아하는데, 쟤는 아이가 둘이고 쟤는 아이가 셋이야. 쟤의 처제가 얘를 좋아하는데 또 쟤의 여동생은 얘를 대학교 때부터 좋아했고, 얘의 형이 있는데 걔가 그 여동생을 좋아하고, 그 여동생이랑 처제랑은 친구고......"
(나)
누구 하나 동떨어짐 없이, 끈끈하게 얽혀 있는 관계가 과연 주말 드라마 다웠다.
어쨌든 복잡한 관계도에 점점 적응을 하며 드라마를 보면 볼수록 아, 이 드라마 매력이 있다. 누가 봐도 '좋은' 사람인 주인공 안재욱과 소유진. 그 둘만 놓고 봤을 때 그들의 사랑은 더없이 아름답고,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어른의 사랑은, 단지 두 사람의 감정으로만 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 그 현실이 무척이나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흥미로운 점은, 이 드라마에는 수많은 갈등이 펼쳐지지만 (성격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등장인물 중 그 누구도 명백한 '악인'은 없다는 것이다. 그 말인 즉, 그 누구도 그 상황에서는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것. 딱히 그 사람이 못나서, 나빠서가 아니다. 누구라도 그 시어머니의 입장이었다면 아이 셋이 있는 여자와의 결혼을 반대했을 것이다. 조금 유별나긴 하지만, 일찍 하늘나라로 간 딸의 남편이 재혼을 하는 것, 그리고 딸의 분신처럼 애지중지 키워온 아이들이 다른 엄마를 만난다는 것에 마음이 아프지 않을 장모도 없을 것이다. 이제 막 사랑하게 된 사람이, 실은 내가 오래 좋아했던 이의 형이라면 마음이 어떨지... 아웅다웅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며 누구나 그 상황에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공감이 됐다.
그만큼, 사랑이라는 것은 복잡한 것이다. 특히 사랑에 '가족'이라는 문제가 끼어드는 순간 더욱 그렇다.
Scene #2
한 달 전쯤 결혼한 친구를 만났다. 갑작스럽게 결혼을 발표해놓고("23. 외로울 땐,"의 그녀), 가족끼리 조촐하게 결혼식을 한 후였다. 그래 어때, 신혼 생활은 좀 할 만 한지?! 달콤 쌉쌀한 이야기를 기대하며 그 친구를 만났다. 그런데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의 대부분은 결혼 준비 과정과 결혼 후, 그녀의 시어머니와 있었던 갈등에 대한 것이었다. 해외 유학파 출신에, 7년 넘게 전문 분야에서 일을 하고, 지금은 MBA에 다니고 있는 그녀가, 시월드의 스트레스를 토로하는 것이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지방 초등학교의 교장 선생님이라고 한다. '교장 선생님'의 이미지에 걸맞게 깐깐하시고 뭐 하나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전형적이 시어머니의 모습 그대로였다. 결혼식장 테이블 배치에서부터, 시댁 방문에 대한 것까지... 시어머니와 그녀 사이의 갈등에 대해 듣고 있노라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리고 언제나 그런 이야기에는 무심하고 둔감한 남편이 빠지질 않는다. "시월드 (feat. 남편)"
점차 결혼하는 친구들이 늘어나면서 결혼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다. 남자 친구들은 여전히 철이 없고, 뭐 재밌는 게 없나 늘 찾고 다니고, 때론 마냥 신혼 생활이 좋단다. 그런데 여자 친구들 중에는 많은 수가 시댁과의 갈등에 대해서 고민하고, 힘들어한다.
"결혼은 둘이 하는 게 아니라, 여섯이서 하는 거더라구."
결혼은커녕 여자 친구조차 없는 나지만, 그 날 그 친구의 말이 꽤나 와 닿았다.
Scene #3
작년에 결혼한 후배가 있었다. 분명 3월에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오래 사귀긴 했지만 남자 친구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심지어 곧 헤어질 것 같다고까지 말했다. 그런데 5월에 만나서는 청첩장을 주었다. 나는 신기해서 어떻게 결혼을 결정하게 되었는지 물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부모님들끼리 만난 자리에서 그렇게 결정이 되었다고 말했다.
"음?! 야, 신기하네. 상견례를 하고 나서 오히려 집안끼리 더 안 좋아져서 파혼이 되는 경우도 있다던데 너는 어떻게 그렇게 잘 된 거야?"
"실은 그 자리는 상견례 자리도 아니었어요. 그냥 저랑 남자 친구랑 오래 만났으니, 부모님들도 한 번 다 같이 뵙자는 자리였어요. 근데 그게 상견례가 되어버렸지 뭐예요."
"어떻게?"
"글쎄, 양쪽 부모님들이 다... 우리 애가 부족한데 이렇게 그쪽 자제분께서 만나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아니요 무슨 말씀을요, 우리 애가 더 부족한데 그쪽 아드님께서 잘 챙겨주셔서 그나마 지내고 있는 거지요... 이렇게 이야기가 되다 보니까 분위기가 좋아져서 결국 날짜를 잡아버렸어요."
"와, 양 쪽 부모님이 다 굉장히 겸손하시네."
"근데... 아무래도 진심인 것 같아요. (웃음) 우리 엄마는 진짜 맨날 나보고 모자라다고, 부족하다고 그러시는 걸요."
어느 부모인들 내 자식이 최고라는 생각, 내 자식만 한 사람이 없다는 마음이 없겠는가. 하지만 정말로 자녀들의 사랑과 결혼생활을 위한다면, 이렇게 내 아이가 더 부족하다는 마음을 가져주시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Scene #4
내가 졸업한 학과에서 진행하는 멘토링 프로그램이 있었다. 졸업한 선배와 아직 학부생인 후배들을 연결하여, 사회 경험을 나누고 조언을 해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다른 멘토분들에 비해서 많이 젊었지만, 그래도 아직 생생한 취업 성공기를 전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지원을 하였다. 그렇게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의 후배들과 멘토링을 하게 되었다.
지난주 멘티들과 식사를 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그런데 남자 후배가 전날 술을 많이 마시고 정신이 없어서 약속 시간에 많이 늦을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식사는 여자 후배와 둘이서 먹게 되었다.
두 후배 모두 친해져서 이런저런 일상에 관련된 이야기까지 주고받는 사이였다. 특히 여자 후배는 작년에 큰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 후 병문안을 가서 후배의 어머님도 뵙고 온 적이 있었다. 후배는 휴식이 필요한 상태였기 때문에 어머님과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후배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나와 같은 그룹 계열사에서 일하는 후배의 오빠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둘이서 밥을 먹다 보니 주제가 자연스레 후배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가게 되었다. 오빠가 작년에 결혼을 했는데, 새언니 때문에 집안 분위기가 무척이나 안 좋다는 것이다. 후배의 가족들과는 전혀 코드가 맞지 않고, 이기적으로 굴어서 어머님도 후배도 몹시 힘들어한다는 내용이었다. 보통은 결혼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시누이'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몹시 흥미로웠다. 어쨌든 나는 후배와 어머님 편이니까 같이 맞짱구를 쳐주었다.
"그래서 제가 얼른 취업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응? 왜?"
"이제 곧 아빠도 은퇴하시고... 제가 얼른 취업을 해서 매달 부모님 용돈이라도 드려야 부모님께서 좋아하실 거잖아요. 오빠가 자식 구실을 못하니 저라도 해야지요."
나는 꽤나 놀랐다. 다들 얼른 돈 벌어서 자기 사고 싶은 것 사고, 자기 하고 싶은 것을 하려는 마음들로 가득한 게 보통일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어버이날이나 명절, 생일 때만 용돈을 드릴 뿐 매달 용돈을 드리지는 않는다. 나중에 아빠가 정년퇴임하시면 매달 용돈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극히 최근이다. 그런데 이 친구는 취업도 하기 전에 벌써부터 돈을 벌어서 부모님께 용돈을 드릴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 순간, 미묘하게 나의 감정에 파장이 이는 것을 느꼈다.
'아, 이 친구랑 결혼을 하면 참 행복하겠다.'
지금껏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결혼'이라는 것을 떠올려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본인의 가족을 대하는 따뜻한 마음을 접하자, 문득 이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 사람과 결혼을 한다면 온 가족이 행복해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는 나랑 나이 차이도 제법 나고, 남자 친구도 있다. 그래서 내가 그 자리에서 그 친구에게 그런 낌새를 드러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이런 내 감정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지금까지 나는 '사랑'만 생각했다. 그 사람과 나의 관계만을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이 나이가 되니 가족이라는 것에 대하여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결혼을 해서 그렇게 행복한 가족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깊어진다.
'가족'이라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억압적인 제도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모두가 결혼을 해서 다른 가족과 만나고, 새로운 가정을 꾸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지 나에게는 내가 만들고 싶은 아름다운 '가족'의 모습이 있다. 그리고 그 '가족'의 모습에 잘 맞는 사람을 만났을 때 느껴지는 감정은, 분명히 그 이전에 누군가에게 느끼던 호감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사랑에, '가족'을 생각하게 되었다.
나와 내가 사랑하는 모든 가족들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저 순종적이고 희생하는 하는 걸 바라는 건 결코 아니다. 그 사람이 행복하지 않다면, 그것은 가족으로서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비록 다른 부분이 많겠지만 서로 이해해주면서, 서로 보듬어주면서.
그렇게 '가족'으로서 평생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