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관심 가는 사람도 없고, 그냥 그렇게 지내요."
나이 먹으니 거짓말만 늘었다. 그렇다. 120% 거짓말이다. 연애를 안 한 적은 있어도 누군가를 마음속에 두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한 번에 두 사람을 좋아한 적은 없지만, 아침에 눈을 떠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던 적도 없었다. 자기소개서의 취미, 특기란에 '짝사랑'이라고 쓸 수만 있었다면, 굳이 독서나 영화감상 같은 말도 안되는 것들 중에서도 무얼 써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중간중간 이 지옥 같은 짝-사랑에서 나를 구해 준 그녀들이 있어 아직까지 숨을 쉬고 살아가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십 대 때는 짝사랑도 괜찮았던 것 같다. 기다리는 시간도 아름다웠다. 그러다가 결국 아무도 모르게 그녀를 마음속에서 밀어낸다 하더라도, 나는 또다시 사랑을 시작할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삼십 대가 되니 그렇지가 않다. 만약 내가 그녀를 몇 년 간 기다린다고 해보자. 그녀가 내게 올 거라는 확신만 있다면, 몇 년이 문제겠는가. 하지만 만약 그녀가 결국 내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면. 혹시 지금 만나는 사람, 혹은 다른 사람과 결국 결혼을 하게 된다면... 한 살 한 살, 연애의 유통기한이 끝나가는 지금, 짝사랑은 나에게 지나친 사치이고,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낭만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 친구에게 남자 친구가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점점 빠져드는 이 마음이 대책 없고 무서웠다. 여러 번의 소개팅을 해도, 그녀와 이야기 나누던 시간들보다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커다란 의미가 되었다. 전혀 사적이지 않은 그녀의 연락에도,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엄한 주위 사람들을 끌어들여 별로 친하지도 않은 이들과 몇 번을 만나기도 했다. 당연히도 그녀의 SNS에 올라온 모든 사진에 '좋아요'를 눌렀고, 나와 만나기 전에 올렸던 사진들까지 찾아봤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내 마음을 표현하기는 어려웠다. 나이 차이도 조금 있었고, 어쨌든 공적인 만남을 통해 알게 된 사이라서 이런 나의 감정이 일을 그르치는 것 역시 싫었기 때문이다. 그냥 앓고만 있었다.
'또 시작했네.'
아차 싶었지만, 그땐 이미 늦었다.
적잖은 시간 그녀를 알고 지내고, 페북이나 인스타로 어찌 사는지 지켜보면서 마음속으로 작은 기대감을 갖기 시작했다. 그녀가 올리는 일상 사진들 중에 꽤나 오랫동안 남자 친구와 찍은 사진이 올라오지 않았다. 혹시나,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녀가 지금 혼자라는 사실이 확실해지면, 이번엔 꼭 그녀에게 고백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전전긍긍. 더 심하게 앓기 시작한 내 마음. 너무 괴로워서 버티기가 힘든 순간이 오고, 그녀에게 직접 남자 친구와 헤어졌는지 물어보려던 찰나,
그녀의 계정에 남자 친구가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올라왔다.
네모난 프레임 안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와 남자 친구의 얼굴을 한참 동안...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외면하지 말자고. 이것이 현실이니 이제 그만하라고. 진짜 좀 제발 그만 하라고.
다시 가을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떻냐고? 글쎄... 주체할 수 없었던 마음은 많이 옅어진 것 같다. 하지만 다른 이가 내 마음속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여전히 그녀가 나의 1순위인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예전처럼 매일 같이 그녀의 SNS에 들어가지는 않지만, 가끔 혹시라도 그녀와 남자 친구가 함께 찍은 사진이 지워지진 않았는지 슬쩍 확인해본다.
노력하고 있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두려워, 누군가 만나 뜨겁게 사랑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것이 어디 마음처럼 되던가.
짝사랑도, 새로운 사랑도. 이 나이가 되었는데도 마음처럼 되는 게 하나도 없다.
짝사랑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군가 나에게 방법이라도 알려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끝까지 기다리라고, 아니면 지금이라도 그만두라고... 결국 그녀와 나의 관계가 어찌 될지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가 봐도 안될 게 뻔한데, 나만 집착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만.)
나에게 억만금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 돈을 다 그녀에게 주어, 그녀의 마음이 나에게 올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하지만 억만금도 없고, 그런다고 그녀의 마음이 어찌 될지도 모르고, 시간은 점점 내 마음을 옥좨어 오니.
삼십 대의 짝사랑만큼 멍청한 짓도 없는 것 같다. 참.
가을입니다.
짝사랑도 버릇이라고,
아직 이십 대인 분들은 시작도 하지 마시고,
삼십 대 친구들은 지금이라도 빨리 이 버릇을 고치시길 바랄게요.
이상, 고구마 100개 먹은 것 같은. 좋은비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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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대상 출간, <서른의 연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