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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은비 Nov 04. 2016

38.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날씨가 좀 추워지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어버렸지만, 이번 여름은 참 더웠다. 이 더위에 그냥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다. 먹고살아야 하니 직장에 나가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 외 모든 것들을 위한 에너지가 부족했다. 이 정도로 '대인기피'를 운운하는 것은 가당치 않겠지만, 가능한 모든 만남을 미루었다.


"찬 바람이 불면, 만납시다."


친한 친구들도, 새로운 만남도.

도무지 올 것 같지 않던 가을로 미루었다. 그렇게 온 여름을 홀로 보다.




무더위도 슬슬 막바지로 치달을 즈음, 회사 동기가 여러 동료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오피스텔에 살면서도 나와 다르게 이것저것 멋진 인테리어와 다이닝이 가능한 조리도구, 식기들을 갖추고 누군가를 초대하기 좋아하는 친구였다. 비슷한 나이 또래의 동료들이 금요일 밤 모여 친구의 요리와 함께 와인을 나누어 마셨다. 부어라 마셔라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좋은 요리와 편안한 분위기에 다들 부담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그날의 음식들)



금요일이 되면 으레 우리는 주말에 무엇을 할 것인지를 물어보곤 한다. 어차피 평일의 삶이야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고, 그 모습은 서로 너무나 잘 알기에, 각자에게 또 다른 삶이 펼쳐지는 '주말'이라는 시간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OO님(=나)은 주말에 뭐하세요?"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동료가 나에게도 물었다.


"음, 글쎄요...


토요일엔 : 오전에 가볍게 운동을 하고 / 오후에 낮잠을 자고 / 저녁에 무한도전을 봐요.


일요일엔 : 오전에 예배를 드리고 / 오후에 낮잠을 자고 / 저녁에 1박 2일을 봐요."


"아, 진짜요?ㅋㅋㅋ"


"이런 주말을 보낸 지 꽤 오래된 것 같아요. 하하. 저 엄청 평범하고 따분한 사람인 것 같죠."


지난 연애가 끝나고, 실제로 나의 모든 주말은 저랬다. 한두 주였으면 푹 쉬는 거라고 하겠지만, 거의 몇 달간 저리 지내다 보니 스스로가 참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공허하고, 외롭고, 한 없이 덧없게만 느껴지던 하루하루였다.

그런데 내 말을 들은 그 동료가 얘기했다.


"엥? 아니요?"


"음?"


"저는요, 기획실에 있는 분들 한 명 한 명을 볼 때마다 정말 특별하고 대단한 것 같아요. 모두가 각자의 색깔이 뚜렷하고 너무 멋있잖아요. 제가 보기엔, 다들 이 세상의 주인공들 같으셔요."


마음속에 작은 파동이 일었다. 내게는 정말 비루하고 지겨운 일상인데,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 친구에게는 멋진 '무대'이고, 그 안에서 나를 '주인공'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지만, 그것조차도 누군가에게는 그럴싸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


"내 삶의 주인공은 나야."라는 말은 흔하지만, 스스로의 의지로 삶의 주체가 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었다.

반면 "네 삶이 참 괜찮아 보이고, 넌 그 안에서 주인공인 것 같아."라는 말을 들으니, 그 순간 나 자신이 달라 보였다.





"이번에 기획실에서도 신입 사원을 뽑는데요."


"안 그래도 학교 후배들한테 지원하라고 이야기해 줬어요. 좋은 사람들이 많이 왔으면 좋겠네요."


"HR팀에 물어보니까 기획실 티오는 1명이래요."


"아... 1명이라니, 너무 적다."


"근데 지원자가 몇 명인 줄 아세요?"


"??"


"2800명."


"헉!!!!!"




2800명.

매일 아침, 가기 싫어서 1분이라도 더 이불속에서 버티다가 꾸역꾸역 씻고 출근하는 바로 그 일, 그 자리에 오고 싶어 하는 사람이 2800명.


내 이 지긋지긋한 삶이, 그분들의 눈에는 어찌 보일까.

내게는 더없이 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가, 누군가에게는 너무나도 간절한 것일 수 있다는 사실.

2800명이 바라는 이 곳, 이 자리에 앉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특별하고 감사한 일인지!





(다들 주말 잘 보내요)







아침에 일어나 폰을 확인했을 때, 단 한 통의 메시지가 와 있지 않고,

주말 내내 약속 하나 없이, TV 앞에서 예능만 보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쩌다 괜찮다 싶어서 찍어서 SNS에 올렸건만,

몇 시간이 지나도 댓글은커녕 좋아요 하나 없어서 부끄러움에 다시 사진을 내리곤 한다 해도.



큰 포부를 안고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왔지만,

그저 그런 일들을 반복하며, 거대한 톱니바퀴의 작은 부품처럼 느껴지더라도.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의 이면이, 실은 온통 말도 안 되는 비리와 부정으로 얼룩져있고,

나는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수년을 사랑했던 이에게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결국 이별은 그 사람이 아닌 내 차지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내 삶, 당신의 삶.


꽤나 괜찮고 누군가는 부러워하는 '무대'이자,

결국엔 해피엔딩으로 끝날 '이야기'이고

그 안에서 나와 당신은 '주인공'이라는 사실.


코 끝에 차고 맑은 바람이 스치니, 그 당연한 진실이 새삼스레 마음에 와 닿았다.











그렇게 조금씩 마음의 에너지를 회복하고 있을 때 즈음, 한 동안 연락 않고 지내던 후배 녀석의 뜬금없는 문자 한 통.



"형, 요즘 만나는 사람 없지? 소개팅 해라."





그렇게 긴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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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대상 출간, <서른의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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