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현대백화점 9층, CGV IMAX관 출구 앞 화장실.
막 영화가 끝나고 화장실에 다녀왔다. 그런데 아직 그녀가 나오지 않아 기다리고 있다.
주위엔 나 말고도 많은 남자들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한 번도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 본 적이 없기에 알 수 없지만, 동시에 화장실에 들어가더라도 항상 기다리는 것은 남자들의 몫이다. 여자 화장실은 미로처럼 더 복잡하거나, 아니면 남자 화장실엔 없는 무언가 특별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실제로 화장실에서 나오는 여자분들의 얼굴을 얼핏 보면, 종종 들어갈 때와는 무언가가 미묘하게 바뀌어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주로 입술 부분인 것 같은데, 뭐 그렇게 유심히 본 것은 아니므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이 분들 중에는 아마도 잘 나가는 영화, 그것도 IMAX관을 예약하기 위해서 나처럼 매일매일 영화 예약 앱을 들여다본 이들도 있을 것이다. 앱을 켰다 껐다 하면서 오늘자 예약이 열렸는지 수시로 체크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예약이 열리자마자 학부생이 수강신청을 하듯이 광클 신공을 발휘하여 예약에 성공하고는 그녀와 함께할 생각에 만세를 불렀겠지. 이 얼마 만에 느껴본 긴장감이란 말인가! 게다가 나는 평일이 그녀의 일정을 알 수가 없어서,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저녁을 연달아 예매해 놓았었단 말씀! 긴장과 환희가 교차하던 3번의 예매라니... 그 험난한 영화 예매에 성공한 동지들이라 그런지 왠지 모를 연대감이 느껴진다.
영화는 꽤나 재미있었다. 이제 막 영화가 끝난 후라서, 장면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다. 시각적 효과가 뛰어난 영화라 그런지 더더욱 잔상이 오래 남는다. 그런데 말입니다. 오늘 내 머릿속에 더 생생하게 남아있는 것은 영화를 보는 중간중간 웃던, 움찔하고 놀라던, 안타까워하던, 통쾌해하던 그녀의 반응들이다. 내가 선택해서 같이 보자고 했던 이 영화를 그녀가 좋아할까, 온통 신경은 거기에 쏠려있었다. 감독님 고마워. 오늘의 초이스는 괜찮았던 것 같아요.
혼자 있는 동안, 참 오랫동안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지 못했다. 내가 이렇게 얘기하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영화관에서 혼자 영화 보는 것도 좋아하는데."라고 말한다. 나도 지난 연애 기간 동안에는 그런 줄 알았다. 대부분은 같이 영화를 보았지만, 아주 가끔 혼자서 영화를 볼 때의 느낌도 괜찮았던 것 같다. 그래서 헤어지고 나서도 영화관에서 혼자 영화 보는 게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다.
아마도 문제는 코엑스 메가박스가 아니었나 싶다. 집에서 가장 가까우면서 환경이 좋은 영화관이 코엑스 메가박스였다. 헤어지고 나서 두어 번 정도 이곳에 혼자서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 보는 것 자체는 괜찮았다. 어차피 불 꺼지는 영화관이고, 누가 볼 사람도 없으니 대충 모자 하나 눌러쓰고 홀가분하게 가서 영화 감상에 집중할 수 있으니 좋았다. 문제는 거기까지 오가는 시간들이었다. 영화관은 코엑스의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코엑스 쇼핑몰과 식당가를 한참 가로질러 가야 했다. 주로 업무가 끝나고 볼 수 있는 저녁시간 영화를 예매했는데, 영화를 보러 가는 길에는 온통 커플들이 코엑스를 가득 매우고 있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면 10시가 조금 넘는 시간이었는데, 그때는 또 사람이 아무도 없고 가게들도 문을 닫아서 텅 빈 코엑스를 터벅터벅 홀로 걸어와야 했다. 커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가, 아무도 없는 코엑스를 홀로 걸어 나오는 기분. 한없이 외로운 그 느낌적인 느낌 때문에 혼자서 영화 보러 가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니 같이 보고 같이 좋아하는 그 공감이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아무리 좋은 영화라도 혼자 감동 받고 혼자 삭히는 것은 공허했다. 점점 영화를 집에서 VOD로 다운받아 보는 일까지 줄어들었다. 너무너무 보고 싶은 영화는, 역설적으로 더 보지 않게 되었다.
'나중에 좋은 사람이 생기면 같이 봐야지.'
이렇게 미뤄놓은 영화가 한 두 편이 아니었다.
화장실에서 누군가 나올 때마다 움찔움찔 모든 남자들의 시선이 쏠린다. 무심한 척 딴 데 보고 있는 고수들도 있지만, 그들도 온통 그녀가 나오는지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이 뻔히 느껴진다. 화장실에서 나오는 그녀들은 휘 한 번 둘러보고는 본인의 짝꿍을 낚아채서(?) 팔짱을 끼고 에스컬레이터를 타러 간다.
한 명 한 명, 떠나갈 때마다 우리는 암묵적인 인사를 나눈다. 짝꿍이 일찍 나오다니 좋겠네. 난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 수고했어, 오늘도. 남은 시간도 행복하게 보내시게. 안녕히.
나의 그녀는 화장실에 들어가면 유독 시간이 더 오래 걸리는 것 같다. 아직 만난 지 얼마 안돼서 그런지 무언가 더 많이 신경 쓰는 게 느껴진다. 나에게 가방을 맡기거나, 자리에 가방을 두고 가는 법이 없다. 괜찮은데. 신경 안 써도 충분한데...
이윽고 그녀.
"오래 기다리셨죠. 죄송해요."
"아녜요. 금방 나오셨는걸요 뭐. 그럼 갈까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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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대상 출간, <서른의 연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