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님에게 누군가 다가오는 사람이 생겼다는 소식에 진심으로 기뻤다. 하지만 인연이라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도 미묘한 것. 그 무엇보다도 '억지'라는 것이 통하지 않는 게 바로 연애이고 사랑이 아닐는지.
관계를 '정리'했다는 차분한 미루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미루님에게도, 그리고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지만 미루님께 정성을 다 했던 그분에게도 더 큰 행복이 있길 기원했다.
그런데 이별 이후 그분의 행동에 대해 듣고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 미루님과 함께 속해있던 그룹의 단톡방은 물론이거니와 카톡을 아예 탈퇴하셨다는 이야기.
카톡을 탈퇴했다는 건 인간관계의 단절 선언이자 잠적이 아닌가.
알고 있다. 그분이 얼마나 아플지. 갑작스러운 거절에 하늘이 무너질 듯이 아프고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슬픔을 나와 관계된 모든 사람에게 드러내고, 또 미루님께 드러내는 것에 대해서 (미루님의 친구인 나는) 못내 마음이 불편해졌다.
대학교 때 사귀던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참 힘들어하던 중에, 그 친구가 곧 나와 같은 공동체의 다른 남자 후배와 사귄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헤어짐의 아픔도 체 가시기 전이었는데, 그녀가 벌써 다른 사랑을 시작했다는 말을 들으니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말을 옮기기 좋아하는 친구들은, 나랑 헤어지기 전부터 이미 그녀의 마음이 그 친구에게 가 있었다고, 너만 몰랐던 거라고 얘기해줬다. 그것은 정말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이별이었다.
그때는 싸이월드의 기세가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다. 내 또래라면 누구나 지금은 이불킥 백번은 하고 싶은 글을 미니홈피의 다이어리에 올린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참담한 마음을 - 공식적으로는 사적이지만, 결코 사적이지 않은- 다이어리에 아주 조금 풀어놓았다. 그리고 그 글을 보기 위해 내 미니홈피의 히트수가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참 유치하게도 통쾌한 마음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 며칠 후, 나와 가장 가까웠지만 또한 단호했던 여자 동기가 이야기했다.
그 글, 지우라고. 너 지금 정말 비겁하다고.
어쨌든 당사자 모두가 같은 공간에 속해있는데, 내가 그렇게 공공연하게 그 두 사람을 비난하고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모두에게 좋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더군다나 내가 '남자' '선배'라는 위치에 있기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만약 그녀가 그냥 그 글을 지우라고만 했다면, 어쩌면 몹시 불쾌하거나 납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덧붙였다.
"지금 네가 원하는 건 네 감정을 공동체 모두에게 드러내고, 그녀와 그 후배가 불행해지는 게 아니잖아. 우리가 보둠아 줄게. 아프다고 징징대는 건, 네가 의지 할 수 있고 너를 안아줄 수 있는 우리에게만 해도 충분해."
이별에 쿨해지라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관계를 정리한 쪽도, 거절을 당한 쪽도... 함께 있는 동안 진심을 다했다면 이별에 쿨해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별의 시간은, 내 마음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가혹하고도 잔인한 때이다.
다만 몇 번의 사랑만큼이나 몇 번의 이별을 경험해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이별에도 배려가 있다면,
그것은
최선을 다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죽을힘을 다해서, 괜찮게 지내는 것.
슬픔은, 각자가 감당해야 할 몫으로 벅차지 않은가.
아픔을 드러내는 것은, 여전희 내가 믿고 기댈 수 있는 사람들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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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대상 출간, <서른의 연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