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좋은비 Dec 16. 2018

49. 연애는 밥, 영화, 여행


서른다섯을 한 달 앞두고도 아직 싱글에 솔로인지라, 으레 연말 모임이나 술자리에 앉으면 나의 연애사에 대해 자의(10%)로 타의(90%)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된다.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세요?", "이상형이 어떤 사람인데?"이다. 소개해 줄 것도 아니면서, 왜 그게 그리도 궁금한 것인지.


어차피 지나가는 주제이기에, 가벼운 자리에서는 그냥 "예쁘고 귀엽고 맘이 착한, 세상에는 없는 사람이요."라고 말한다. 근데 얼마 전, 꽤나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자리에서는 마냥 실없는 소리를 할 수가 없어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지금 나는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있는 것일까?


각자가 생각하는 연인, 이상형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연애는 결국 세 가지다. 밥, 영화, 그리고 여행.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싶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식사 약속을 잡는 것이다.

평일 점심, 평일 저녁, 주말 점심, 주말 저녁으로 갈수록 기대하는 관계의 깊이가 깊어진다.

"이번 주말에 뭐해요? 시간 있으면 저녁 같이 먹을래요?"라는 말보다 확실한 의사표현은 없다고 봐야 한다.


소개팅은 가장 직접적으로 연애를 지향하는 만남이기에, 관계의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식사로 넘어간다.

하지만 밥을 건너뛸 수는 없다. 그만큼 함께 앉아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모든 관계, 특히 연애에 있어서는 중요한 일인 것이다.


그리고 관계가 깊어지면 현대인들은 영화를 본다. 영화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즐길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오락이다. 손쉽게 접근할 수 있고, 가격 대비 얻는 만족도도 매우 크다. 그리고 대중문화답게 취향과 선호의 카테고리가 한정적이라서, 상대방의 반응을 예상하기가 쉽고, 그만큼 선택의 실패 확률도 낮다. 이렇게 복잡하게 원인을 따져보지 않더라도, 그냥 보통의 연애를 하는 우리가 데이트에서 가장 많이 하는 것이 영화 보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생각이 들면, 우리는 함께 여행을 떠난다.


결국 행복한 연애를 위해서는 이 세 가지가 잘 맞아야 한다.






(이하 안물안궁 TMI)


나는 입이 짧은 편이다. 아예 못 먹는 음식이 많고 편식도 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맛은 까다로운, 꽤나 골치 아픈 식습관을 가지고 있다. 다만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내가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식사를 대충 때우기도 하고, 안 먹어도 괜찮은 경우도 많다. 하지만 정말 맛있는 음식을 만났을 때, 나는 진심으로 기쁘고 행복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먹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한 끼를 먹더라도 조금 더 맛있는 것을 찾아보고 먹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으면, 이것 먹을까, 저것 먹을까 고민하다가 둘 다 먹어야겠어!를 외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만난 음식점이 별로였을 때는, 전의를 불태우며 다음 음식 선택에 집중하는 사람, 그렇게 만난 음식점이 좋았을 때는, 세상 모든 스트레스를 내려놓고 마음껏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입이 짧은 나를 질질 끌고 가 맛난 것을 먹이고는 자기 일처럼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었면 좋겠다. 연애하면서 가장 많은 시간이 서로 앉아서 밥 먹는 시간일 텐데, 그 시간을 행복으로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 나의 이상형이다.





좋아하는 영화의 스펙트럼은 무척 넓다. 우리가 흔히 예술 영화, 다양성 영화라고 부르는 영화에서부터 슈퍼히어로 블록버스터까지 두루두루 좋아한다. 뭐라고 내 취향을 딱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꼭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솔로가 된 이후로 몇 번 혼자서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영화가 아무리 좋았어도 그 시간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영화 자체보다도, 멋진 영화를 보고 그 감정을 누군가와 공유하는 것이었다. 너무너무 좋은 영화를 보고,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도록 움직이지 못하다가, 영화관 복도를 걸어 나오면서 말없이 눈빛을 교환할 때의 그 공감. "와, 재밌다..."라고 첫마디를 나지막이 내뱉었을 때, "응, 정말."이라고 상기된 얼굴로 답해 줄 수 있는 사람.






사람마다 여행의 스타일도 천차만별인데, 나에게 여행은 한마디로 "걷는 것"이다. 유명한 관광 명소나 인터넷에 소개된 맛집에 다 둘러봐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다. 그저 아침에 일어나, 가고 싶은 곳을 한 곳 찍는다. 그리고 그곳으로 걸어간다.


이러한 여행 스타일은 생애 첫 해외여행이었던 교토에서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스마트폰도 없었고, 당연히 구글맵도 없었다. 교토역에서 내려 관광안내지도 한 장을 뽑아 들고 무턱대고 버스를 탔다가 길을 잃어버렸다. 그때부터 친구와 나는 하염없이 걷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가자고 하면 이쪽으로, 저쪽으로 가자고 하면 저쪽으로 꺾었다. 그러다가 나오는 신기한 가게가 있으면 들어가 보기도 하고, 식사 시간이 되어 배가 고프면 사람들이 줄 서 있는 작은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었다. 걷다 보니 무슨 신사도 나오고, 절도 나왔는데 어떤 건 들어가 보고 어떤 건 그냥 지나쳤다. 그때 나에게 중요했던 것은 교토의 명소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친구와 대화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더 간절하고 소중했다.

그렇게 하루 종일 교토를 '헤매다'왔다. 그런데 나중에 우연히 교토의 관광지를 소개한 블로그 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렇게 길을 잃고 목적 없이 걷다가 봤던 그 모든 길과 장소들이 모두 다 이른바 '관광 명소'였던 것이다. 점과 점으로 이루어진 여행이 아닌, 선으로 이어지는 여행. 그때부터 나는 두 발로 걷는 여행의 매력이 푹 빠졌다.


우리의 여행도 그러했으면 좋겠다.

지하철보다는 버스를, 버스보다는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

걷다가 우연히 이름도 모르는 일본의 중학교 운동장에서 야구하고 있는 소년들을 보며 아다치 마치루의 만화 <H2>와 델리스파이스의 <고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오늘은 어디로 가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멀거나 사정이 생겨서 갈 수 없을 때, 굳이 집착하지 않고 미련 없이 가까운 공원으로 가서 걷고, 쉬고, 책을 읽으며 또 다른 여행을 만끽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라면 정말 오랜 시간 함께하면서, 같이 떠나는 여행을 꿈꿀 수 있을 것 같다.





왠지 쓰다 보니 차라리 "예쁘고 귀엽고 맘이 착한 사람"이 차라리 더 쉬울 것 같다는 예감이 들고,

이러니 아직도 짝을 못 찾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연애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 삶의 가장 중요한 일이다 보니 이렇게 장황하게 남겨 보았다.







연애는 밥, 영화, 여행.


함께 떠나

맛있는 것을 먹고, 종일 걷다가,

숙소로 돌아와 같이 자고 사랑을 나누고,

이른 아침 낯선 공간에서 소중한 이와 함께 눈을 뜨는 꿈.


현실은 비록 맛없는 음식에 바가지를 쓸 때도 많을 것이고,

낯선 타국의 시내 광장에서 소매치기를 당하거나, 지하철에 가방을 두고 내려 패닉에 빠지는 일이 생기겠지만


그래도 멀리서 보면 인생은 희극이고,

연애는 낭만이니까.














(*2018년 12월 16일 새벽 2시. 홀로 삿포로에 여행와서 씀)






매거진의 이전글 서른다섯엔,  서른다섯의 글을.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