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퇴부 근처에서 미세한 진동이 올라왔다. 아마도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의 울림일 테고, 높은 확률로 폭염을 주의하라는 안내 문자일 것이다. 딱히 손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집을 나선 지 반시간도 채 안되어 온몸을 땀에 적시는 날씨였으니까. 어느 순간부턴 코까지 저릿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는데, 그 또한 이 고온다습한 기후 때문일 것이다. 확신은 없지만, 후끈거리는 열기가 후각에 영향을 주었다던가 하는 그런 이유로 말이다.
쓰잘데기 없는 생각이 많아지게 되는 건, 이 무더위의 계절이 내게 주는 수많은 영향 중 하나였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뜨거운 열기가 시간을 늘어지게 만드는 것만 같은 느낌. 때문에 공상에 젖어들 시간도 정비례로 늘어났다고 한다면 적당히 들어줄만한 말은 되지 않을까.
아니, 사실은 알고 있다. 이 모든 헛소리는 열기 때문이 아니라, 눈앞에 놓인 신호등 때문이라는 걸 말이다. 혹여나 열기에 무언가 고장나진 않았을까 하는 의심도 불가능하게끔, 사계절 내내 신호 변화가 느려 터진 속칭 거북이 신호등. 좌측 차도에 직진 신호가 들어오고도 약 삼십 초가량의 시간이 지나서야 초록불을 점멸하는 느릿한 신호등이었다.
뭐, 그렇다고 딱히 싫어한다거나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게 있어 시간과 공상이란 어느 허름한 식당의 밑반찬처럼 늘 남아도는 것이니까. 새것인 지 재탕인지 알 수도 없고, 누구 하나 신경 쓰는 사람도 없는 그런 것들 말이다. 문제는 내 안에 있으니, 신호등을 미워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하루에 채워야 하는 일정량의 공상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녀석이 그것을 지원해주고 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곧 이러한 줏대 없는 공상들이 습관처럼 나래를 달고 '엄연히 녹색불이 점멸해야 할 시간에 불이 들어오지 않아 교통사고를 당한다면, 그것은 도로교통법상 무단횡단에 해당하는가'에 대해 토론을 벌일 즈음이었다.
"아빠, 땅이 갈라졌어요."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니, 병아리같이 노란 모자를 쓴 대여섯 살 쯤의 아이가 있었다. 녀석은 아빠의 손을 두드리며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고, 그 작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엔 식물의 뿌리처럼 잔뜩 갈라진 아스팔트가 흉물스럽게 이어져있었다.
"응, 아스팔트가 오래되어서 그래."
폐암 말기 중 사망한 100세 노인의 사인을 자연사로 판명하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마냥 틀린 건 아니지만, 정답도 아니라는 뜻이다. 아스팔트의 균열은 표면이 하부에 비해 일교차, 연교차에 따른 수축과 팽창 과정을 보다 반복적으로 겪으면서 생기는 거니까.
피 냄새를 맡은 피라냐마냥 유영하던 내 공상은 어느새 그가 뱉은 말에 달라붙어 물고 뜯고 씹어 댔지만, 그 또한 잠시일 뿐이었다. 아스팔트는 왜 수축과 팽창을 했었는지 명확히 떠오르지가 않아, 연성을 가지고 있는 재질이었는지에 대한 토론으로 일파만파 퍼져나갔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조차 오래가진 않았지만.
"아스팔트에 가뭄이 온 거예요? 그럼 내가 물을 주면 안 돼요?"
아이다운 동문서답에 아이다운 발상의 해결법이긴 했지만, 그 역시 정답은 아니었다. 오히려 절대 실행으로 이어지면 안 되는 일이었다. 물이 스며든 아스팔트 하부에 차량의 하중이 가해지면, 압력의 분산을 위해 수분이 이동하며 하부의 손상이 반복되고 그 결과 표면 아래에 빈 공간이 생기게 될 테니까. 무엇보다도 그랬다간 언젠가 내가 차를 이끌고 이곳을 지나가다 무너진 아스팔트에 끼일지도 모를 일이니까. 하지만 아이 아빠는 나와 달랐다. 더위에 일그러졌던 표정에 미소가 깃들더니, 그는 큼지막한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기분 좋게 헝크러트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돌아가서 집 앞의 아스팔트에 아빠랑 같이 물 주자."
거북이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자 부자는 이 뜨거운 열기 속에서도 손을 꼭 잡고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나는 이성적으로는 그들을 붙잡고 말려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발걸음이 좀처럼 떨어지질 않았다. 당신네들이 어디 사는지 몰라도, 저 조그만 손으로 퍼담을 물이 연간 강수량에 비하면 미미할지라도, 내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요소를 증가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하는데. 가는 길에 분무기를 사자는 아이의 목소리는 그 사이 벌써 횡단보도를 절반 지난 지점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아이의 신장이 작아서인지, 아지랑이의 굴절 범위가 넓어서인지 녀석은 전신을 꿀렁거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을 내린 건, 하염없이 그들을 바라보다 거북이 신호등이 답지 않게 녹색 신호를 빠르게 점멸할 즈음에서였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내가 슬리퍼를 신고 왔으니까. 아지랑이가 여느 날보다 면적이 컸으니까. 아지랑이의 면적이 크다는 건 지면이 더 뜨겁게 달궈졌기 때문이니까. 그렇기에 이 고무 재질의 슬리퍼는 횡단보도를 건너다 녹아내릴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러다 이 거북이 신호등 아래에서 사고를 당하면 도로교통법상 내 과실이 얼마나 책정될지 알지 못하니까.
집을 나선 이유는 이미 잊힌 지 오래였다. 역으로 추론해봐도 잊힌 걸 보면 아마 중요치 않은 것이었을 것이다. 혹은 내가 알지 못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덜 중요한 것이었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글쎄, 내 머릿속에도 아지랑이가 피었다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