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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soozin Jun 16. 2017

숨이 턱까지 차 올랐는데 아직 수면이 멀다.

이 아름다운 발리에서 나는 죽을지도 모르겠다. 

발리 섬 남 쪽 끝, 울루와투 사원을 향하는 길에서 왼쪽으로 꺾어 언덕을 쉼없이 내려가면 파당파당 비치가 숨겨져 있다. 이름마저 이쁜 파당파당 비치에 가려면, 입구를 지나 한 사람만 겨우 지나갈 수 있는 큰 바위 터널을 따라 내려가야 한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이 길이 좁다보니 올라가는 사람 내려가는사람들이 늘 사이좋게 양보하며 서있다. 땡큐를 연발하며 터널을 조심히 통과하면 쏴- 하는 파도소리가 들린다. 여기가 맞는 길인가 하면서 사람들을 따라 내려가는 사람들에게 마치 여기에 바다가 있다고 알려주는 듯이. 



짧은 터널이 끝나면 숨겨져 있던 아름다운 해변이 모습을 드러낸다. 반사적으로 눈을질끈 감게 만드는 뜨거운 햇살, 햇살에 쉴새 없이 반짝이는 바다, 고운 모래, 끊임없이 몰려오는 파도들, 파도를 즐기는 서퍼들. 눈을 감고 천천히 떠올리면 나는 파당파당 비치 입구에 서있을 수 있다. 다시 한번 “와-“하고 또 감탄하면서. 


파당파당 비치는 절벽에 둘러 쌓여 있어서 다른 비치에 비해 크기가 작다. 처음엔 이게 다야? 싶었지만 이름 만큼 이쁜 비치와 좋은 파도 때문에 우리는 파당파당 비치에 매일매일 출근 도장을 찍었다. 같은 날이 반복 되는 것 마냥 매일 바위 터널을 내려와 바다를 보면서도 나는 그 아름다움에 반했다. 


몸에 오일을 바르고 비치에 누워 빨갛게 익을대로 익은 유러피안들, 그 사이를 걸어다니며 천을 파는 발리안 아줌마들, 구명 서핑보드가 나가야 하니 여기엔 앉으면 안된다고 관광객들을 쫓아내는 라이프가드들. 매일 꼭 같은 장면인데도 어찌나 꿈같고 아름다운지 모른다. 내 마음 어딘가에는 돌고래 한마리가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돌고래가 나를 늘 바다로 이끈다. 엄마 얘 탓이에요. 


오늘은 발리에서의 마지막 날, 발리를 여행 중인 잼쏭부부에게 부탁해 서핑 영상도 찍기로 했다. 이날을 위해 매일 파당파당 비치에 도장을 찍으며 여기 바다에 익숙해지려고 연습을 했다구!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해변에 서핑보드샵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파당파당이 작은 해변이지만 세 군데도 넘는곳에서 서핑보드를 빌려주는데 오늘은 모든 곳이 텅텅 비어있었다. 역시나 가는 날이 장날 인겐가. 파도는 그림 같이 몰려오는데 하늘이 나를 저버린건가. 다같이 빙탕맥주나 한잔하고 아쉬워 하며 돌아가야 하는 건가. 하는데 매일 서핑보드를 빌리는 집에 주인 아줌마가 보인다. 


"보드?" 이러고 슬쩍 떠봤더니 "롱보드?" 란다. 평소처럼 긴거 빌릴 거냐며 묻는 거보니 아싸! 빌릴 수 있나보다. 같이 간 남자친구는 바다가 예사롭지 않다며 걱정인 눈치지만 모르겠다. 일단 나가고 보자. 바다 한 가운데 있어도 보드만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을 거야. 


너는 안 들어가도 돼. 나는 들어갈거야. 했더니 슬쩍 자존심이 상했는지 자기도 들어가겠다며 남자친구가 따라나선다. 롱보드를 허리에 끼고 바다로 가려는데 라이프가드 아저씨가 말을 건다. 이 아저씨 맨날 인상만 쓰고 인사해도 받아주지 않았는데 그래도 나 며칠 봤다고 이제 좀 아는 체를 하는 건가? 생각하는데 아저씨가 저기 먼 바다를 가리키면서 저기 파도 중앙에 들어가지 말고 그 옆에서 놀라고 말한다. 역시 착각은 자유지. 응응 알았어요. 돈 워리. 아돈 워너 다이 투데이 (걱정마요. 나도 오늘 죽고 싶진 않아요) 랬더니 아저씨가 처음으로 웃는 얼굴을 보여주고는 돌아서서 간다. 


힘차게 몰아치는 파도들이 겹겹이다. 왼쪽에서 오른쪽에서 무작위로 파도가 몰려온다. 게다가 며칠간은 보이지 않던 배럴파도가 왼쪽 먼바다에 생겨서 상급자 서퍼들은 거기로 우루루 몰려갔다. 섹시한 서퍼들은 3-4미터씩 높이 솟구쳤다가 부서지는 파도를 탄다. 나는 아직 초짜라 지켜만 보는데도 오금이저린다. 그렇지만 그런 서퍼들은 정말 섹시하다. 나도 언젠가는 이라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패들링해 라이프 가드 아저씨가 일러준 작은 파도로 향했다. 


서핑할 땐 파도를 읽는게 제일 중요하다. 보드 위에 앉아 먼 바다에서 파도가 밀려오는 걸 유심히 쳐다봐야 한다. 넘실거리며 둥그스름하게 밀려오는 파도가 언젠가 어느 포인트에서는 힘이 불어나면서 힘차게 부서져 내린다. 그 타이밍에 맞춰 보드를 파도에 올려야 서핑을 즐길 수 있다. 


파도가 부서지는 지점, 혹은 조금 뒷 편에 자리 잡고 있어야 파도를 잡기 좋다. 물론 실력 좋은 서퍼들이야 포인트에서 조금 떨어져있다고 해도 금방 파도를 따라잡을 수 있지. 실력자는 파도를 탓하지 않는 법. 좋은 포인트를 찾아서 뒤에서 다가오는 파도 속도에 맞춰 패들링을 하다보면 파도가 보드를 밀어주는 걸 느낄 수 있다. 아직은 나도 초보자기 때문에 열번 시도에 세네번 파도를 탈 수 있을까 말까다. 파도에 올라탄게 느껴지면 그땐 일어나도 괜찮다. 완전 초보자들은 꼭 파도가 밀려간뒤에 보드에 올라서려고 뒤뚱거리다 넘어진다. 물론 나도 그랬다.


좋은 지점에 자리를 잡고는 뒤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흘끗 쳐다보면서 패들링을 한다. 그러면 점점 가까워지는 파도 소리가 들린다. 이제는 이 소리만 들어도 내가 이 파도에 올라탈 수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촤르르르 부서지는 파도소리가크면 클 수록 이 파도가 나를 데리고 갈 확률이 높지만 내가 제대로 반응하지 않으면 보드코를 바다 속으로 처박고 바닷물 속에서 데굴데굴 굴러야 할 확률도 덩달아 높아진다. 쏴아아- 이 파도는 감이 좋다. 갈 수 있겠는 걸 하고 힘차게 패들링 한다. 나 함께 가고 싶어- 파도에게 말을 걸면서, 파도의 속도에 맞춰 패들링을 한다. 파도야 나를 데리고 가줘. 


파도가 나를 안아 올려 뭍으로 데려간다. 느낌이 좋다. 보드가 제대로 파도를 잡았다. 풀쩍 뛰어 올라 보드에 서서 부서지는 파도를 따라 왼쪽으로 턴. 부드럽게 파도를 가르면서 보드가 나아간다. 이거다. 파도와 보드, 그리고 나만이 존재하는 세상. 이걸 그렇게 오랫동안 그려왔다. 체감 속도는 충분히 빠르다. 파도의 속도에 맞춰 보드 위에서 스텝을 밟으며 파도와 춤을 춘다. 이 파도가 끝나는 곳까지. 


다시 포인트로 돌아가 파도를 기다리고 올라타고, 구르고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어느새 비기너 포인트에는 나 혼자 남았고 나는나도 모르는 새 파도를 따라 더 먼 바다로 나가고 있었다. 왠지 저 멀리에 있던 배럴 포인트가 가까워 보인다고 느낀 순간,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나는 해변에서 너무 멀리 와있는게아닌가. 게다가 엄청나게 세고 큰 파도가 내 코 앞에서 높이 솟구쳐 올라 부서지려 하고 있다. 망했다. 피할 곳이 없다. 숨을 깊이 들이 마시고 물 속에 휘말릴 준비를 했다. 센 파도의 힘에 휘말려 바다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내동댕이 쳐진다. 숨이 끝날 때 쯤 겨우 물 밖으로 나왔다. 이제 숨을 들이 마실 수 있겠다 싶었는데 또 다시 커다란 파도가 코 앞에서 쏟아져 내린다. 


파도는 한꺼번에 밀려온다. 처음 서핑을 배울 때 일기장에 적어둔 내용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적어도 대여섯번의 큰 파도가 몰려오겠구나 생각했다. 나는 파도가 부서지는 가장 깊숙한 곳, 파도의 중앙에서 표류하고 있는 중이다. 깊은 물 속에 꼬라박혀 거침없는 파도의 힘에 휩쓸렸다. 가까스로 수면으로 올라와 숨을 들이키고 나면 집채만한 파도가 다시 나를 덥쳤다. 네 번째쯤 파도에 말렸을 때, 파도 밑으로 안전히 파고 들었다 생각했는데 보드와 나를 연결한 리쉬가 정신없이 나를 끌어당겼다. 보드가 주인도 없이 파도를 잡은 모양이다. 말 뒤에 묶여진 죄인마냥 바다 속에서 속절없이 보드에 딸려갔다. 


물 속에서 쉴새없이 내동댕이 쳐졌다. 몰려오는 파도 탓에 충분하게 들이키지 못한 채 물 속에 휘말렸다. 일단 물 위로 올라서 숨을 쉬어야 한다. 바다 바닥의 날카로운 산호를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숨이 턱까지 차 올랐는데 아직 수면이 멀다.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있는 힘을 쥐어짜내 위로위로 올라왔다. 잠시 파도가 잠잠하다. 해변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보드에 올라 앉아 손을 마구 저으면서 헬프미를 외쳤다. 나 죽을 것 같아요. 이러다 정말 죽을 지도 모르겠어요. 


처음으로 덜컥 겁이 났다. 계속 이렇게 큰 파도에 휘말리다가는 나는 죽고 말거다.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하고 파도에 휘말려서 물속을 구르고 구르다 나중에야 발견 되겠지. 몇 Km 안에 사람들이 있고 저기 눈 앞에 안전한 곳이 보이는데 내 손에 닿질 않는다. 아무도 오지 않는다. 아무도 듣지 못하는데도 살려달라는 말이 계속 튀어 나왔다. 살아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저 멀리 큰 포인트로 패들링하는 서퍼들이 보였다. 살려달라고 소리치려는데 또 다른 파도가 나를 덥쳤다. 


꼬르륵. 물 밖으로 나가는 시간이 길어졌다. 내 몸 동작이 느려진게 느껴진다. 이대로 한번 더 파도에 휩쓸렸다가는 끝이다. 보드 위에 몸을 겨우 올리고 이렇게 죽는 건가. 제 능력을 모르고 먼 바다까지 나와서 큰 파도에 휩쓸려 죽는게 내 마지막인가.. 생각하는데 보드가 움직인다. 이 녀석이 내 마음을 읽었는지 파도를 잡은 거다. 


이를 악물고 보드를 움켜 잡았다. 최대한 파도가 부서지는 포인트에서 멀어져야 한다. 나를 죽이려 들던 파도는 다시 내 편에 서서 나를 해변 가까이로 밀어주고 있었다. 자연에는 선과 악이 없다. 그냥 존재할 뿐이다. 파도는 부서졌지만 여전히 세다. 지금 잡은 이 파도에서 넘어지면 안된다. 그럼 다시 파도에 휘말릴 테고 그땐 끝장이다. 살아남겠다는  일념으로 큰 파도 존을 탈출했다. 


몸이 늘어진 게 느껴졌다. 보드를 가까스로 끌고 해변에 앉았다. 평화롭게 햇살을 즐기며 해변에 누운 사람들 옆에서 나는 엉엉 울었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었다. 저 멀리 사람들이 보이는데도 나는 혼자서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계속 파도에 말려들어가 숨을 쉴 수 없었다. 


아직도 그 순간이 생생하다. 그 날 이후로 눈을 감으면 연신 큰 파도가 나를 덥친다. 큰 자연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안전한 인간의 세상을 무시하며 살았는데 이렇게 안전한 세상을 만든 인간들의 능력에 새삼스레 감탄했다. 나는 나약한 존재다. 낡은 스쿠터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남자친구에게 처음으로 사랑이란 단어를 속삭였다.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니 조금 더 힘껏 사랑하고 즐기자고 내 마음이 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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