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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보퓨레 Mar 12. 2021

전람회 ST[컬렉션_오픈해킹체굴]RY

세상에, 정지용의 시를 배우는 돌멩이가 있대.

김범, <정지용의 시를 배운 돌>, 2010


컬렉션_오픈 해킹 채굴

2021.01.26~2021.04.11 @ 서울시립미술관(SeMA)


돌이 바쁜 하루.

돌을 만나러 간다. 바쁘다 하여 찾아간 듯하다.
아직은 차가운 아침 공기가 폐 속 깊숙한 곳으로 파고든다.

하나의 돌은 영상 속에 숨어있다.
커다란 화면 속의 그 녀석은 누구보다 열심히 시를 배우고 있다.

정지용의 시.
아이를 잃었던 슬픔도, 고향을 노래했던 그리움도, 봄을 기다리는 인내도.

돌과 함께 정지용의 시를 배우고 이내 코트와 가방을 챙긴다.
어느새 햇살이 대지를 달궈 따스한 기운이 물씬 느껴진다.

또 다른 돌은 미술관 앞마당에 있다.
거대한 철판을 그저 바라만 보고 나는 그 녀석의 목덜미를 본다.

철과 돌은 다르다고.
하지만 철은 돌이었고, 홀로 늙어버린 철은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다.

이렇게 돌이 분주한 곳이 있었던가.
나라도 여유 있게 숨 쉬어야겠다. 세상의 균형을 위해서.

김범, <정지용의 시를 배운 돌>, 2010
이우환, <항(項), 대화>, 2009


이우환, <항(項), 대화>, 2009


오전 시간에 미술관 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과거 스케줄 근무를 하던 시절, 평일에 미술관이나 전시회장에 가면 넓은 공간 전체가 나를 위해 준비된 듯한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인파가 적은 환경에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 중의 하나죠.

지금 저는 부서를 이동해 다수의 남들과 비슷하게 주말에 휴식합니다. 남들 쉴 때 쉬는 것은 또 다른 행복이지만 동시에 저에게는 불행이기도 했습니다. 주말에 미술관을 가야 했거든요. 고육지책으로 주말 오전에 미술관을 다니기로 했습니다. 이번 주는 오랜만에 시청역 근처에 위치한 서울시립미술관을 방문합니다.


어슬렁 거리며 작품보다는 미술관 자체를 만끽하던 중 첫 번째 바쁜 돌을 만났습니다. 어떤 어른이 쉬지도 않고 정지용의 시를 가르치네요. 돌에게 말이죠.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돌에게 감정 이입되는 것은 신비합니다. 한국의 교육시스템이 만들어낸 괴상한 감상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곧 돌이 되어 강의를 들었습니다. 꽤 좋은 시가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교과서에서 인동차도 봤었고, 언젠가 수능 기출문제로도 몇 개의 시를 더 익혔던 것 같습니다.


오전부터 공부라니, 슬슬 친구를 남겨두고 땡땡이를 치기로 결심합니다. 미술관의 창을 통해서도 빛이 스며들고 있어 나가지 않을 수 없었죠. 이런 날은 잔디밭에서 짜장면....(중략). 차가운 아침 공기에 지나쳤던 또 다른 돌이 보입니다. 커다란 철판을 마주 보고 있는 돌. 대치상황인지 대화를 하고 있는 건지 알기 힘듭니다. 평소 이우환 작가를 좋아했기에 고정관념을 가지고 대화라고 상상합니다. 이래서 미술감상에 배경지식은 치명적인 것이죠. 대화로 상상했던 것도 잠시 묘한 긴장감이 공간 전체에 퍼지기 시작합니다. 따사로운 봄 햇살은 돌과 철 중 누구의 윗도리를 벗게 만들까요?


안팎으로 돌들이 바쁜 모습을 보니 마치 이상한 나라의 구잘트가 된 듯합니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는 돌마저 바쁜 건가. 더 이상한 상념에 빠지기 전에 미술관 밖으로 도망가야겠습니다. 오픈 해킹 채굴. 저 나름대로의 의미로 열고 뜯어보고 발견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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