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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보퓨레 Apr 01. 2022

콧구멍으로 그린 그림

데이비드 슈리글리식의 영국유머

2016년 기괴하고 전위적인 작품을 만났다. 한남동의 작은 미술관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전시장에는 얼굴 모양의 로봇이 있었는데, 마치 로봇 청소기처럼 공간을 이리저리 활보하고 있었다. 나는 로봇의 콧구멍에 꽂힌 두 자루의 연필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콧구멍에 고정된 연필들은 마치 발자국처럼 지나간 자리에 두 개의 선을 남기고 있었다. 황당한 건 때론 규칙적으로, 때론 불규칙하게 이어지는 선들이 모여 차츰 하나의 작품이 되어 가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 기상천외한 콧구멍 드로잉 로봇의 발명가이자 영국 출신의 아티스트 데이비드 슈리글리의 말은 나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평소 추상화를 그리고 싶었는데, 갑자기 추상을 그리면 주변 사람들이 놀랄까봐 로봇을 시킨 것이라고. 혹시 결과가 좋지 않아도 로봇 탓이라고 하면 그만이지 않냐면서 말이다.

영국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영국식 유머를 만날 기회가 가끔 있다. 특유의 해학과 풍자는 때론 정치적인 메시지가 되거나, 인간 본질에 대한 물음표가 되어 우리에게 던져진다. 미술관에 거대한 죽은 상어가 담긴 수족관을 설치한 데미안 허스트나, 자신에게서 채혈한 피로 두상 작품을 만든 마크 퀸을 보면 영국식 유머의 묵직한 메시지를 느낄 수 있다.

데이비드 슈리글리는 얼렁뚱땅 그려낸 듯한 이미지와 몇 개의 심플한 단어를 통해 관람자에게 웃음과 사유의 시간을 함께 선사한다. 아기자기한 그의 드로잉 작품 속 숨은 의미를 찾아보는 재미가 꽤 쏠쏠한 이유이기도 하다. 다음엔 어떤 농담으로 찾아올지 벌써부터 흥미롭다.

#이번전시에콧구멍은없습니다

데이비드 슈리글리 : EXHIBITION
2021.12.18~2022.04.17
KMCA(서울 강남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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