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나를 더 좋은 사람이고 싶게 합니다' (2)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 1997)'의 아름다운 대사다. 누군가, 고양이가 내게 어떤 존재냐고 묻는다면, 똑같이 이렇게 말하고 싶다.
"고양이는 나를 더 좋은 사람이고 싶게 합니다. 더 다정하고 더 부지런하고 더 용기있는 그런. 만약 내가 조금이라도 좋은 사람이었다면 그건 많은 부분 고양이 덕분"이라고.
2009년 생애 첫 고양이 가족 '양양'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지난 11년간 한가족이 된 고양이가 여럿, 반면 당시는 앞날을 몰라 안타까워하고 미안해했지만 결국 진짜 가족을 찾는 여정을 함께 한 고양이도 여럿, 그리고 한참을 지나 생각해도 여전히 아찔한 생사의 순간을 함께 한 고양이도 여럿이다.
그렇게 나의 과거와 현재에, 또 미래 언제 어디서 기적처럼 동화처럼 만나 함께 할 내 생에 모든 고양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다섯 살 무렵 엄마 손을 잡고 동네 마트에 가던 기억이 있다. 꽤나 조바심이 일던 마음의 느낌도 남아 있다. 얼마간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엄마 말씀대로면 꽤 여러 날 떼를 썼던 듯하다. 이유는 "동생을 사고 싶어서". 막내였던 나는 어떤 계기로 동생이 무척 갖고 싶어졌는데, 동생을 마트에서 살 수 없다는 사실은 모를 때였다.
그러나 한동안 간절했던 그 바람도 어딘가로 날려 보낸 채 어른이 됐다. 그런데 문득, 어린 날 그 막무가내 소원이 이뤄졌음을 깨달았다. 생각만 해도 미소가 번지고, 그저 잘 자고 잘 먹고 잘 놀아주는 게 고맙고 대견하고, 똥마저도 사랑스럽고, 평생 곁에서 지켜주고픈 동생이 하나도 아닌 여덟이나 생겼음을.
여덟 동생은 모두 고양이다. 그중에서 제일 먼저 '나무'를 소개하고 싶다. (다른 녀석들에겐 절대 말하지 않겠지만) 나무는 내가 다섯 살 적에 그토록 바랐던 동생 이상형에 최적격의 외모와 성격을 타고났다. 우람하고 오동통한 체구, 성격도 조금의 까칠함이 없이 생긴 것처럼 동글동글 다정다감.
나무는 2011년 태어났다. 꼬리가 몽땅하거나 돌돌 말린 제 엄마와 다른 형제들과 달리 유일하게 나뭇가지처럼 쭉 뻗어 이름이 '나무'다. 꼬리말고도 확연히 다른 하나는 체격. 아기였을 때는 엇비슷한 조무래기 중 하나였는데 저 혼자 쑥쑥 커서는 결국에 제 형제들보다 두세 배 커졌다. 두 손으로 안아 올릴 때 "아이쿠" 하며 앓는 소리가 절로 날 정도다.
이런 나무의 골격이 제 아빠를 쏙 빼닮은 것임을 확인한 날이 있었다. 어느 날 집 마당에 그간 본 적 없는, 하지만 너무 낯이 익은 거대한 체구의 고양이가 앉아 있었다. 평소 도도하기 짝이 없는 보리의 살가운 태도에서 특별한 관계임을 직감했는데, 그와 동시에 '나무인가? 아닌데... 어?' 이렇게 수초 착시인가 싶을 만큼 나무와 판박이 외모라 그들이 부자 관계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풍기는 야성미와 위엄으로 짐작컨대 '지역 짱'이 틀림없을 듯했다.
나무는 아빠의 리더십도 물려받았는지 동네 길냥이들과도 잘 지내는데, 자주 어울려 다니는 두 마리 길고양이가 같이 놀면서도 나무를 대장으로 삼고 아첨을 부리거나 의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도 다섯 살 때부터 초등학교 내내 긴 칼(칼집이 있는 플라스틱 장난감) 옆에 차고 예닐곱 친구들을 이끌었었지!
그렇다고 절대 저보다 작거나 길에서 어렵게 사는 녀석들을 홀대하거나 괴롭히지 않는다. 되레 밥이고 집이고 속없이 다 내어줄 때가 많아 나나 어머니가 "바보야, 너꺼 다 주면 어떡해" 하고 핀잔 아닌 핀잔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듯 너그러운 녀석이 더없이 사랑스럽기도 하다.
실컷 밖에서 놀다 들어오면 꼭 "뉴냐 뉴냐" 하듯 곁에 와 귀여운 소리를 낸다. 가만히 있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발라당 누워선 하얗고 동그란 배를 보여준다. 가끔은 어디서 어쩌다 그랬는지 작은 생채기가 나서 오기도, 다리를 절뚝이거나 먼지를 덮어써 회색 고양이가 돼 돌아오기도 하는데 혼을 내도 그때뿐이다.
고양이의 산책에 대해 난색을 표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안다. '안전' 때문이다. 어린이를 위험한 길에 방치하는 것에 비유하기도 한다. 나 역시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그들이 나와 같이 행복, 호기심을 포함한 다양한 욕구가 있는 존재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니 아이가 다칠까 걱정돼 평생 집 안에만 있게 할 수는 없지 않나.
2020년, 나무가 태어난 지 꼭 10년째다. 분명 함께 살았지만 실감나지 않는 시간이다. 고양이 나이를 사람 나이로 환산하면 나무는 올해 50세다. 고양이의 경우 신체적으로 거의 모든 성장 발달이 이뤄지는 생애 첫 1년을 사람의 18살과 같이 보고 이후부터는 1년에 4살씩 더하는 계산법을 적용하면 그렇다.
나무가 반백살이라니! 그럼 나보다도 8살이 많은 오빠(?)가 되는데. 후우... 내 나이도 나무 나이도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나무에게서 중년스러움, 노화의 조짐은 아직 찾아볼 수 없다. 나무는 여전히 순진명랑한 다섯 살 꼬마 같다. 내가 여전히 철없이 사는 것과도 닮았다. 나무와 놀고 있으면 우리는 그저 어린 남매 같다.
하지만 시간이란 현실이어서 그 사이 나무의 엄마 보리가 저 세상으로 떠났고 보리보다도 먼저 나무의 형제 중 하나인 둘이가 생을 마쳤다. 앞날을 장담할 순 없어도 그래도 대략 15년은 같이 살겠지 했는데, 둘 모두 10년을 못 채우고 새벽 이슬처럼, 한낮 햇살처럼 사라져버렸다.
오늘도 눈이 마주치자마자 발라당 배를 까며 어리광을 피우는 나무가, 밥달라 배고프다 "냐옹 냐옹" 콧등에 주름이 질 만큼 울어대는 나무가, 나도 한 알 먹어보고 싶을 만큼 마른 사료를 맛있게도 아삭아삭 씹어먹는 나무가, 밤이면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나무가 더없이 사랑스럽다. 한편으로 짠하고.
불안이라곤 없는 듯 방 한가운데 너무도 편한 모습으로 누워 잠든 나무를 어루만지며 기도하듯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