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olitical life story
많은 사람들이 뾰죽하게 말하고 날카롭게 화낸다. 그의 죽음이 확인된 이후 시작된 현상이다. 성희롱 및 추행으로 고소됐다지만, 공식의 조사나 수사가 시작되기 전, 공권력이 투입되기 전, 다시 말해 사실관계 확인이 되기 전에, 그는 사망했다. 그는 박원순이다. 그날 그 시각에 이르기 직전까지 서울시장 직을 활발히, 열정적으로 수행하던 육십대 남성이다.
실종과 죽음, 그 이전의 고소(accusation). 연달아 들려오는 비극적 소식들에 나는 그만 상처를 입었다. 이 비극에 직접 연루된 이들이 내게 상처를 입힌 건 아니었다. 내가 그들에게 상처를 받은 건 상처받은 자로서 내게 일어난 현상이었다. 그의 실종과 죽음, 그리고 고소내용에 대하여 내 나름으로 응답(반응)하려는 노력이 경험하는 상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내 안을 들여다보니, 상처받은 느낌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얽혀있는 (딱히 누구에게랄 것 없이 부글부글하기만 한) 분노가 관측되었다. 둘러보니, 딱히 나만 그런 것 같지 않았다. 정의의 감각에 상해를 입은 이들이 제법 많았다. 이 소란한 정국에서 굳이 자기 말을 보태지 않는다 할지라도.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H. Arendt)는 <폭력론(On Violence)>이라는 책에서 말했다. "정의의 감각(sense of justice)에 상처를 입으면 우리는 분노하게 된다"고···. 이 문장이 들어있는 전체 맥락은 분노(rage)가 이른바 '짐승 같은' '비합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이성의 작용' 때문이라는 서술이다. 그리하여 그 문장을 읽을 때 나는 작금의 현상에 대하여 분석적 진단을 받은 기분이 되었다. 이제부터 나는 아렌트의 이 분석을 조금 더 설명해보기로 하겠다.
이 분석에 대하여 동의가 안되는 이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다만 그런 분들에게도 여러 의견들 중 1/n의 의견으로 이 글이 읽히길 바란다.
세상 모든 상처와 아픔에 반드시 가해자나 가해원인이 개입되어있는 건 아니다. 또 빠른 시일 안에 가해-피해의 사실이 낱낱이 밝혀지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 '가해의도'까지 고려하게 되면 사안은 더 복잡해진다. 대개의 경우 가해가 피해를 반드시 양산하지만, 피해는 가해보다 훨씬 폭넓게 일어난다. 피해가 가해를 입증할 수 없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심지어, 명확한 피해임에도 피해자와 피해사실이 가해의 주체를 대번에 명확히 지목하기 어려운 사례도 있다. 진상규명부터 착수해야 하고, 섬세하고 정직한 조사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사례들이 여기 속한다. 세월호 피해자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을 기억해보라. (이외에도 사회적 공분을 일으켰던 많은 사례들···.)
1980년대에, 대대적인 마피아 수사가 한창이던 미국 뉴욕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거의 대다수가 남성요원이었던 FBI 마피아 전담수사팀에 한 여성요원이 발령을 받아 배치됐다. 샬럿 랭(Charlotte A. Lang)이었다. 샬럿을 대면한 수사팀장(supervisor)의 첫인사는 이러했다. "난 자네를 요청한 게 아니었어. 여자가 이런 수사를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난 생각지 않아"라고···. 심각한 성차별적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때 샬럿은 그의 인사말을 이렇게 번역해서 받았다. "안녕, 뉴욕에 잘 왔어."*
*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공포 도시: 마피아와의 전쟁> 3부 중에서.
샬럿은 수사팀장을 고발했었어야 했을까? 저런 사람을 어떻게 '정의로운' 미연방 수사기관(FBI)의 팀장으로 일하게 놔둘 수 있는가, 문책당하도록 했어야 옳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샬럿은 문제삼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껏 일을 열심히 했다. 하지만, (반전이다!) 그녀는 그 말을 잊지 않았다. 그러다가, 역사다큐멘터리에 등장하여 또렷하게 그 말을 재생했다. 억울하다 호소하는 게 아니라 '성인지감수성의 시대적 한계'에 관하여 증언보고서를 쓰듯. (이걸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식으로 설명하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차라리 그때 고발하지, 뒤끝작렬이다, 하는 의견을 가졌을 수도 있다. 정의의 감각에 개인차가 있기 때문에 다양한 정의로운 의견이 가능하다.)
성차별적 발언, 성희롱적 발언에 대한 허용치의 수위는 '여성 개인'마다 동일하지 않다. 공적 영역에서 남성에겐 하지 않는 '여성에게만 하는 특정한 언행' 앞에서, 샬럿처럼 태연한 여성도 있고, 우물쭈물하는 여성도 있고, 한껏 위축되는 여성도 있고, 무작정 회피만 하는 여성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조용히 물러나 고소하는 여성도 있다.
여성을 차별·희롱·추행·폭행하는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라는 주제에 관한 한 여성들의 감각과 반응은 개인에 따라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어떤 여성의 멘탈은 훌륭하고 다른 여성의 멘탈은 저열하거나 이상하고···, 그런 말이 아니다. 여성들 사이에 개인차가 다양하게 존재한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기에 공적 영역에서 여성들간의 개인차는 공적 허용수준으로 일반화/표준화될 필요가 어느 정도는 있다(매뉴얼?!). 하지만 본질은, 모든 업무현장에서 개인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존중이다. 여성 비서와 일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니라, 비서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 사람을 개인으로 존중하며 협력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직급이 비서든 무엇이든 상호존중을 요구할 수 있는 민주적 업무구조가 형성되어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상태 한국사회에서 비서나 매니저의 경우는 '공사(public/private)' 양면에서 전천후로 일해야 하는 '을'의 처지에 종종 놓인다. 비서는 시장의 낮잠용 침실에 드나들어야 했고, 욕실 앞에서 대기해야 했다. 비서가 남성이었다면 이 상황은 소소한(으응?) 갑질로 간주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면 작금의 소용돌이 와중에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한나 아렌트 전공자로서 또 정치를 인간존재론의 차원에서 연구한 정치신학도로서 나는 두 가지를 제안해보고자 한다. 첫째는 무엇보다 먼저, 'A씨와 법률대리인 대(vs.) 박 전 시장 지지자들'로 진영이 형성되어 유지, 강화되지 않도록 주의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아렌트의 폭력론에 비추어볼 때, 즉 정의의 감각에 상처를 입은 것으로 본다면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이 여러 사람들에게서 두루 관찰된다. 분노가 분출되며 흡사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는 모양새를 보이게 된 까닭은 정의의 감각에 입은 상처가 그만큼 아프다는 표현일 수 있다. 누가 더 아프냐, 누가 더 큰 상처를 입었느냐, 경쟁할 필요는 없다. 소모적 경쟁에 불과하며, 상처를 주장할수록 상처가 오히려 덧날 위험이 있다. 반대로 누가 가해자냐, 누가 더 크게 가해하고 있느냐, 가늠할 근거도 없다. 어차피 상처의 경중, 가해의 경중은 원칙적으로 '피해자중심'으로 구성된다. 살짝만 건드려도 크게 상처입어 휘청거리는 피해자가 있을 수 있고, 크게 때렸는데도 거의 괜찮은 피해자도 있을 수 있다.
두 번째는, 작금의 사태를 각자의 입장에 터하여 읽어내는 의견들에 대하여 (서로가 서로를 악당, 공격자, 심지어 음모론자로 취급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그 각각의 의견들이 지닌 진짜 의도를 궁금해하면 좋겠다. 당리당략에 활용하려 하거나 조롱하려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악당이어서가 아니라, 또는 공격 혹은 음모의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정의의 감각에 상처를 입어서 마음에 합리적 분노가 생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의의 감각에 상처를 입은 사람에겐 '어떤 지점에서, 얼마만큼 아픈지, 지금 어느 정도로 힘든지,' 물어보는 게 필요하다. 문득, 죽음을 선택하기 전 박 시장에게 만일 그의 상처에 대해 진지하게 물어본 사람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가정해본다. 대책회의 같은 것 말고 말이다. (박 시장은 또 한 명의, 어떤 의미로든 상처를 입은 사람일지 모른다.)
그런데, 이는 성희롱 및 추행의 피해자에게 제일 먼저 물어야 하는 물음이기도 하다. 어떤 특정한 문제적 행동을 겪어 혼란스러운 이에게 '어떤 지점에서, 얼마만큼 아픈지, 지금 어느 정도로 힘든지' 물어보는 것. 그 물음에 대한 응답이 나오면, 이젠 경청과 이해를 발휘할 차례다. 이때 경청하기 불편하고, 이해하기 어려우면 경청과 이해를 나보다 잘할 수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더 나은 해결일 수 있다.
적어도 '무마하기'나 '묻어두기'의 방침을 취해서는 안된다. "네 문제를 나도 문제로 인식한다"라고 말해주기만 해도 (단, '건성' 아니고 '진심'이어야) 된다. 그런데 그건 사실상 경청이 성립되었고 기초적 이해가 생성되었다는, 유효적절한 싸인이다.
서울시청 안에, 이번 사안이 전개되는 단계마다 절차마다, 법적 고소행위가 일어나기 이전 피해를 호소하는 A씨에게, 그리고 죽음 직전의 박 시장에게, 이 같은 의미의 경청과 이해가 표현되고 전달된 적이 있었을까, 아쉽다. 그리고 마음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