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도록 나는 여성운동단체의 일원으로 활동해왔다. 가정폭력·성폭력 근절을 활동목표로 하는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여성의식 교육을 받았고, 거기서 상당 기간 상담원과 스태프로 일했다. ‘딸들을 위한 캠프(여중생 성교육 프로그램)’에서 강사 노릇을 했으며, ‘성폭력상담사례연구모임’에서 수년간 대표를 맡기도 했다.
현재는 여성 정신건강 사회운동단체 <한국알트루사(Altrusa-Korea)> 부회장으로 활동한다. ‘이기주의(egoism)’보다 덜 유명하나 뜻은 고귀한 단어 ‘이타주의(altruism)’를 단체명 안에 품은 곳이다. 헌데 우리 단체명을 한 번 듣고 그대로 기억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엉뚱하게 ‘한국야쿠르트’나 ‘라스포사’ 같은 브랜드명을 갑자기 떠올리는 분들도 더러 봤다.
그건 그렇고. 여기까지 듣고 나면,
“아하! 더 들을 것도 없네!” 말할 분들이 있을 것 같다. ‘페미니스트’시구만.
그렇지만 나는 평소 페미니스트를 자처하지 않는다. 반면 굳이 부인하지도 않는다. 페미니스트 정체성이 만족스럽지 않아서가 아니다. 또, 페미니스트 정체성이 속칭 ‘꼴통’으로 통용되는 게 부담스러운 탓도 아니다. 한 인간의 정체성을 달랑 단어 하나로 단정하고, 그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근거로 그 사람을 파악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정체성이라는 것의 의미를 생각할 때면, 몇 년 전 추석 명절 무렵 경향신문에 발표된 “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라”는 칼럼이 떠오르곤 한다. 서울대 김영민 교수의 작품이다. 한 대목을 인용해보겠다.
친척이 명절을 핑계로 집요하게 당신의 인생에 대해 캐물어 온다면, 그들이 평소에 직면하지 않았을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게 좋다. 당숙이 “너 언제 취직할 거니”라고 물으면, “곧 하겠죠, 뭐”라고 얼버무리지 말고 “당숙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추석 때라서 일부러 물어보는 거란다”라고 하거든, “추석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엄마가 “너 대체 결혼할 거니 말 거니”라고 물으면, “결혼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거기에 대해 “얘가 미쳤나”라고 말하면, “제정신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경향신문, 2018. 9월 21일자)
김영민 교수가 해당 칼럼에서 다룬 주제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의 필요성’이었다. 흔히 우리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고 지낸다. 그것은 김 교수 말마따나 평소에는 잘 직면하지 않는 근본적인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위기상황이란 힘겨운 것이긴 하나, 근본적 질문을 발산케 하는 유익한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그날그날 표면적 근황과 가시적 행위에 관심을 두고 일상을 살다가, 위기상황에 부딪히면 비로소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고, 김 교수는 썼다. 관련하여 그는 자신의 친구 한 명을 예시했다.
과거 사귀던 여자친구에게 몹시 느끼한 문장을 구사하는 연애편지를 써보냈던 한 친구는 현재 과학분야에서 활동한다. 어느 날, 연애편지 집필자 정체성이 만천하에 공개되자(?) 그는 위기상황임을 직감했다. 부인할까, 인정할까, 낯뜨거울 만큼 감성충만했던 자신의 정체성을 그는 어떻게 다룰 것인가. 마침내 친구는 놀림감이 된 자신이 불만스러워서 평정심을 잃고 김 교수를 향해 괴성을 지르며 항의했다나···.
김 교수 친구의 상황이 어쩌면 지금의 내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내 사연인즉 이러하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휴일 즈음, 나는 <브리저튼>이라는 시리즈 영화를 관람했다. 하루에 4편씩 정주행하여 이틀을 꼬박 소비했다. 이 작품은 말하자면 전형적인 ‘할리퀸 스토리’다. 결혼에 목을 매는 여자 주인공이 등장한다. 남자 주인공은 지체 높고 돈 많고 잘생긴 귀족인데, 그에겐 치명적 약점이 있다. 물론 둘은 연인이 되어 사랑의 힘으로 함께 남자의 약점을 극복함으로써 마침내 해피엔딩에 도달한다.
<브리저튼>은 19세기초 영국사회에서 귀족계급에 속한 남자 주인공을 흑인으로 설정하고, 작중 시대배경을 초월해 현대의 대중가요를 배경음악으로 사용하는 등 역사적 현실에 일부러 균열을 주었다. 게다가 여자 주인공은 21세기 페미니스트들이 공감할 만한 언행을 깜찍할 정도로 적재적소에서 발산한다. 하지만, 전체 줄거리는 ‘할리퀸 스토리’의 품격(!) 그대로다.
페미니스트라면 이런 ‘할리퀸 스토리’에 부화뇌동하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브리저튼>은 내 안에서 설렘과 활력 같은 것을 일깨웠다. 두 연인의 언행과 표정에서는 클리셰(상투적 표현)가 범람했으나 과하지 않다 느꼈다. 소위 여성 취향의 ‘오글오글거리는’ 대사들도 배우들의 호연에 힘입어 흐뭇하게 전달받을 수 있었다. 고백컨대, 페미니즘의 잣대 같은 것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요컨대 페미니즘과 친화력 높은 인생을 살아온 내가 목하 정체성 위기상황을 맞은 셈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아니 사실은, 지난해 말과 올해 초, 여성이슈들에 대한 여러 보도들을 대하면서 내 안에서는 위기상황이 살살 고조되던 참이었다. 고 박원순 서울시장 사건에 관련해 갑자기 모 여성단체 쪽 사과 성명서가 보도되는가 하면, ‘피소사실 사전유출’은 여전히 논쟁거리다. 그런 데다 1월 14일엔 법원 판결 가운데 박 시장의 성추행이 기정사실로 언급되기도 했다.
그뿐 아니다. 한 야당 국회의원의 성추행 조사 직전 탈당, 전남대 성폭행 사건에 대한 검찰 측의 별 기기묘묘 황당무계한 의견 등···, 나의 위기상황 수치를 심각단계로 올리는 데에 영향을 주는 일들이 연속해서 다가왔다.
결국 이제 나는, 평소 잘 생각지 않고 지나치는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내 삶의 위기상황마다 조금씩 변천해온 나의 정체성에 대하여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겠다는 결심. 달리 말하면, 김 교수의 “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라”를 오마주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는 거다.
어쩌면 내가 좀 늦은 건지도 모른다. 여성이슈를 생산·논쟁하는 한국사회의 방식에 대해 이런저런 위기감을 느끼는 여러 사람들은 이미 이 질문을 사색하고 있을 테니···. 페미니스트 숫자가 적지 않은 이 시대,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