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모임은 핑계고

15년 지기 친구들과 독서 모임을 시작했다

by 안진진

정확하게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친구들 앞에서는 책 이야기를 깊게 하는 것이 어쩐지 쑥스럽고 민망하다. 어렸을 때 만난 친구들일수록 더 그렇다. 단지 교실에서 옆자리에 앉았다는 이유만으로 친해진 친구들과 시간을 보낼 때는 정신연령도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다. 요즘 말로 '뇌를 빼고' 대화한다는 뜻이다. 나에겐 그런 친구가 중학교 무리 3명, 고등학교 무리 5명으로 총 8명이 있다.


이 친구들을 만나면 나는 주로 진로 상담이나 인생 고민 대신 '요즘 내 눈에 가장 잘생긴 남자배우듀스101' 같은 것을 하며 낄낄거린다. 우리 사이에 아주 약간이라도 사유를 요구하는 활동이 끼어들 틈은 없다. 물론 끼어들 분위기도 아니다. 서강준, 이수혁, 김영대─월간남친 이야기 맞다─의 외모에 대한 치열한 토론이 한창인 와중에 친구들에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시몬은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마 대답 대신 "뭔 X소리냐"는 비난을 받을 것이다. 그런 우리가 지금, 같은 테이블 안에 둘러앉아 있다. 책을 들고 말이다.


25년부터 1년 동안 G로부터 초대받은 독서 모임에 주기적으로 참여하면서 나는 함께 읽고 대화를 나누는 일의 이점을 여러 방면으로 톡톡히 체감하고 있었다. 독서를 더 잘 즐길 수 있게 된다는 상투적인 장점이 아니라도, 독서 모임은 내가 일상을 활기차게 꾸리는 데 비타민 같은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같은 관심사를 기반으로,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약 두 시간 가까이 몰입해서 대화를 하는 것은 그 자체로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나는 이 즐거움을 친구들과도 나누고 싶었다. 허물없이 장난만 치며 노는 것도 친하니까 가능한 일이지만, 우리 사이에 '뇌를 장착한 채' 지성과 교양을 한 스푼이라도 첨가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했다. 때마침 한해를 돌아보기 좋은 연말이 다가오고 있었고, 또 때마침 고등학교 친구들이 단체 카톡방에서 송년회 날짜를 잡고 있었다.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어, 이번 송년회에는 독서 모임을 같이 한번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언뜻 보면 농담인 것 같은 말투와 장난스러운 이모티콘도 덧붙였다. 정기적으로 하자는 게 아니라 재미로 하는 거라고도 구구절절 남겼다. 걱정과는 달리 친구들은 흔쾌히 긍정을 뜻하는 각종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연례행사와도 같은 친구들과의 송년회가 이렇게나 긴장된 적이 있던가.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12월 어느 저녁, 나는 약간 들뜬 마음을 안고 백팩에 책 한 권을 넣은 채로 H의 친언니가 운영하는 요리주점에 향했다. 왜 독서모임을 주점에서 하냐고 묻는다면 나도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전날 밤 나는 친구들과 간단한 식사 후 한적한 카페에서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상상하며 발제문을 작성했다. 하지만 같은 시각, 친구들은 H 언니 식당의 시그니처 메뉴 중 하나인 알배추 샐러드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었다. 독서 모임을 함께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기 때문에, 나는 한 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이날 나에게는 두 가지의 임무가 주어졌다. 첫 번째는 처음으로 독서 모임 참가자가 아닌 모임장으로써의 역할을 다하는 것, 두 번째는 술과 분위기에 취하지 않고 모임을 무사히 마치는 것. 일하는 곳이 요리주점 바로 근처인 H는 사무실에서 내가 대화방에 공유한 발제문을 출력해 와주었다. 퇴근하고 곧장 달려온 J는 노트와 필기도구까지 야무지게 챙겨왔고, Y는 자연스럽게 아이패드와 지정 도서를 꺼냈다. 모임에 생각보다 진지하게 임하는 친구들의 모습에 감동하려는 찰나, 테이블 위로 메뉴판이 불쑥 들어왔다. 야야, 일단 먹고 할까?


정신차려 보니 책은 뒷전, 값비싼 와인 한 병이 테이블 위로 올라온 순간부터 우리의 분위기는 빠르게 고조되었다. 물론 맛깔난 음식도 한몫했다. 나는 알배추 샐러드를 포함한 메인 메뉴 4개를 먹고, 알배추 샐러드를 한 번 더 리필한 후에 책 이야기를 슬쩍 꺼낼 수 있었다. 함께 모인 지 2시간이 지난 후였다. 친구들의 얼굴이 하나둘 빨갛게 달아오를 때쯤에는 정말 안 되겠다 싶어, 이제 시작해 보는 건 어떻겠냐고 운을 띄웠다. 친구들은 어어 맞다, 그래그래 하면서 약간 둔한 몸짓으로 주섬주섬 가방을 뒤적였다. 15년 지기와 헤롱헤롱한 상태로 책 이야기를 한다니, 상황이 그 자체로 '잼컨'이었다. 웃음이 나왔다.




우리가 함께 읽은 책은 박소령 작가의 《실패를 통과하는 일》이었다. 이 책은 콘텐츠 스타트업 '퍼블리' 창업자인 작가가 10년 전 회사를 세우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대표의 직함을 내려놓는 순간까지의 모든 여정을 세세하게 담고 있다. 이야기는 작가가 퇴사 후 책을 쓰게 된 계기에서부터 출발해 그녀의 여정을 되감기 하듯 역순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제목이 암시하듯이 책에는 그녀가 생각하는 과거의 잘못된 판단과 후회, 실수 등이 적나라하게 적혀있다. 대신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모든 뼈아픈 경험을 깨달음과 통찰로 맞바꾼다.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깃거리들이 비눗방울처럼 푱푱 떠올랐다. 만약 1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절대 하지 않을 일 혹은 꼭 도전해 보고 싶은 일, 올해 후회 없이 열심히 했던 일, 후회되는 일 등. 나는 떠오르는 모든 아이디어를 메모장에 적어두었다가, 펀딩 사이트에서 매해 구매했던 연말정산 노트의 포맷을 빌려 발제문을 작성했다. 이를테면, '올해 ( )만큼은 후회 없이 했다'라는 질문에, 괄호에 해당하는 내용을 채우는 식이다. 첫 독서 모임이자 송년회이니만큼 책에 대해 깊이 파고들기 보다는 각자의 1년을 돌아볼 수 있는 질문을 위주로 구성했다.


다행히도 H 언니의 주점에서는 찻상을 함께 판매하고 있었다. 우리는 술도 깨고 분위기도 바꿔볼 겸 대만산 우롱차를 주문했다. 어느새 각자의 앞에 책과 각종 준비물을 꺼내놓은 친구들은 알딸딸한 건지 어색한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애꿎은 주전자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세상에나 이렇게 차분하고 또 조용할 수가. 조금 전까지 귀가 터지도록 떠들던 여자들은 어느새 새 학기 첫날 모드가 되어있었다. 나는 안 되겠다 싶어 모임장님의 유려한 진행 실력을 떠올려가며 한 명씩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Y님, 올 한 해 가장 즐거웠던 일은 무엇이었나요? 후회되었던 일은요?


처음에는 어색해서 이상한 소리로 웃거나 몸부림을 치던 친구들도 이내 조금씩 적응이 되었는지 제법 진지한 어조로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J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요가 센터에 갔고, H는 ‘두쫀쿠’를 먹거나 손으로 일기를 썼다고 했다. Y는 회사로부터 잠시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휴직계를 냈는데, 그게 올해 최고의 선택이라고 했다. 최근에는 바이브 코딩에 취미가 생겼다고 했다. 세 사람은 새해 목표로 각각 꾸준한 기록, 발레, 마음 단련을 언급했다. 매일 카톡방에서 시시콜콜한 일상을 공유해 웬만한 일상은 다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도, 함께 모여 앉아 회고하는 1년은 또 다르게 다가왔다.


찻주전자가 바닥을 보일 무렵 우리들의 이야기는 이미 책의 주제에서 벗어나 저 멀리 산골짜기 어딘가로 가있었다. 굳이 책과 접점을 만들어 보자면 모임장으로써 개최한 나의 첫 독서 모임도 실패를 통과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나는 딱히 바로 잡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모임장 자격 박탈이라고 해도 할 말 없다. 그래도 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다. 정확히는 각자의 삶 바깥에서 벌어지는 가십이나 표면적인 근황이 아닌 우리의 진짜 내면을 공유하는 것이 좋았다. 애정하는 유튜브 콘텐츠 이름처럼 독서 모임은 핑계고, 그저 친구들과 좀 더 깊게 떠들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어느덧 돌아갈 시간이 되어 자리를 정리하고 가방을 챙기고 있을 때, 누군가 말했다. "우리 다음에는 무슨 책 읽어?" 그러자 또 한 명이 당연하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러게, 언제 모일까?" 나의 두 번째 정기 독서 모임이자, 모임장으로써 활동하는 첫 번째 독서 모임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최진영 작가님의 《구의 증명》도 함께 읽었다.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