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독 보존의 법칙

수상할 정도로 너그러운 독서 모임

by 안진진


4월이라고는 믿을 수 없이 더웠던 어느 토요일, 나는 양 어깨에 두툼한 가방을 이고 지고 삼청동길을 헉헉대며 오르고 있었다. 오른쪽 어깨에 매달린 큼직한 가죽 숄더백에는 책 몇 권과 파우치, 보조 배터리 등이, 왼쪽 어깨에 걸쳐진 밀리의 서재(작년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이벤트 참여하고 받았다) 에코백에는 두툼한 돗자리가 돌돌 말린 채로 들어 있었다. 날씨가 좋아도 너무 좋았던 탓에 안국역에서부터 삼청동까지 나들이객의 발길은 끊일 줄 몰랐다. 손에 든 것 없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산뜻하게 거니는 이들을 게임하듯이 요리조리 피하다 보니 목뒤와 등이 어느새 땀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시작도 안 했는데 몰려오는 피로를 느끼며 나는 잠시 후회했다. 야외 독서 모임을 제안한 것을.


연말에 송년회 겸 고등학교 친구들과 재미 삼아 시도했던 독서 모임이 월례 행사로 자리 잡아 5번째 모임을 앞두고 있을 무렵이었다. 아지트처럼 매번 같은 카페에서 모이는 기존 독서 모임과는 다르게 우리의 모임 장소는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날씨에 맞춰 즉흥적으로 변하고는 했다. 모임 며칠 전 날씨 앱에 접속해 토요일 날씨를 확인하니 아침부터 해가 지기 전까지 종일 해 그림이 이어졌고 낮 기온은 20도를 웃돌았다. 몸이 근질근질했다. 들판 위에 앉거나 누워 시원한 음료를 마시면서 내리쬐는 비타민D를 온몸으로 흡수하고 싶었다. 곧장 단톡방을 열어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얘들아, 정독도서관 피크닉 고?


하지만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밀려드는 이 미친 인파를 보니 벌써부터 피로가 밀려오는 것이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끝없이 이어지는 언덕길을 걷다 보니 정독도서관 주차장 표지판이 언뜻 눈에 띄었다. 그 뒤로 승용차들이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길게 줄지어 있었다. 다시 보니 표지판 앞에 '만차'라고 적혀 있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다들 같은 생각으로 피크닉을 즐기러 온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넷이 앉을 자리가 없을 수도 있다. 주최 측이 무리하게 티켓을 팔아 돗자리와 돗자리 사이 한 뼘 정도의 공간을 둘 틈도 없이, 생판 처음 보는 이들과 닭장처럼 붙어 앉아야 했던 몇 년 전 한 뮤직 페스티벌에서의 악몽이 떠올랐다. 말도 안 돼, 나의 첫 책크닉이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한산할 수 있나? 나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약간 얼빠진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잔디밭에는 드문드문 빈백이 놓여있었고, 그 위에서 누군가는 눈을 붙이고 또 누군가는 책을 읽고 있었다. 일렬로 늘어선 벤치 위에서는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이 참새처럼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돗자리를 펼 수 있는 공간은 고민스러울 정도로 많았다. 나무 한 그루 전부를 햇빛 가리개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여유로웠다. 그제야 깨달았다. 사람들은 도서관이 아니라 도서관 주차장을 찾은 것이라는 사실을. 어디가 좋을지 두리번 거리고 있을 때, 이미 빨간 체크무늬 돗자리를 깔고 자리를 잡은 H가 저 멀리서 손을 휘휘 흔들었다.






근처 카페에서 일을 하다 온 Y는 도착하자마자 앓는 소리를 하며 벌러덩 누웠다.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3개월간 짧은 휴직을 하고 봄부터 다시 회사로 돌아간 Y는 몰아치는 업무에 야근과 주말 근무를 밥 먹듯이 하고 있었다. 그녀의 일과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한가하게 독서 모임이나 나오라는 소리를 할 수 없었다. 부담 갖지 말라고, 쉬어도 된다고 했지만 Y는 특유의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우리 몫의 음료와 빵까지 한 아름 사 들고 등장했다.


새카만 프라다 선글라스를 낀 채로 Y는 한동안 가만히 누워 있었다. 선팅이 워낙 강해 눈을 감고 있는 건지 뜨고 있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운 자세 그대로 가방에서 더듬더듬 책을 꺼냈다. 그러더니 대뜸 어떤 문장을 낭랑하게 낭독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뉘앙스에 관한 이야기다.' 흘긋 쳐다보니 책의 가장 맨 앞 장, 첫 문장이었다. 웃음이 터진 채로 물었다. 너 지금 독서를 시작하는 거니...?


Y는 지정 도서가 선정되자마자 잽싸게 책을 구매했지만, 일에 치여 한 장도 넘겨보지 못했다고 능청을 떨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H가 얘들아, 난 30페이지밖에 안 남았거든? 잠깐만 기다려봐. 금방이면 돼. 랩 하듯이 말하며 책장을 넘기는 것이다. 우리의 모임은 주로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 두 사람이 책을 다 읽으면 또 다른 사람은 3분의 2 정도만 읽은 채로 모임에 참석하고, 또 다른 사람은 아예 책이 무슨 내용인지 모른 채로 뻔뻔스럽게 앉아 있는다.


보통의 독서 모임이라면 책을 다 읽지 못했을 때 진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눈치를 보거나 변명을 늘어놓기 마련이지만, 우리는 어떻게 돼도 '만사 오케이'로 일관한다. 이리저리 치이기 바쁜 인생, 서로에게만큼은 한없이 너그러워지자고. 누구도 소리내 말한 적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으레 지켜지고 있는 룰. 그게 우리 모임의 규칙이라면 규칙이다.


결국 이날의 모임은 준비해간 발제문에 대해 저마다 의견을 말하는 시간, 그리고 질문과 관련한 책의 내용을 Y에게 설명해 주는 시간이 6:4 정도의 비율로 이루어졌다. 다행이랄지 이번 도서는 완독 여부에 관계 없이 모두 말할 거리가 많은 주제였다. 업무 목적이든 사적으로든 메일을 한 번이라도 써본 적이 있다면 할 말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슬아 작가의《인생을 바꾸는 이메일 쓰기》였다. 우리는 각자의 메일 습관부터 업무할 때 자주 쓰는 용어, 이모티콘 사용 여부까지 시시콜콜한 것들을 공유하며 고등학교 때부터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 마주한 적 없을 서로의 모습을 떠올렸다. 표정 없는 얼굴로, 하나도 안 감사하지만 감사하다고 말하며 웃는 이모티콘을 남기는 K직장인의 페르소나를.


"나는 미국 웃음이 만능 치트키야. 너네도 미국 웃음 써?"

"미국 웃음은 약간 느끼해. 나는 그냥 웃음웃음."

"(손가락으로 획을 4번 그리며) 이거 말하는 거지?"

"웃음웃음이 더 별로지 않아?"

"나는 연배 있는 분들이랑 주로 소통을 해서 그게 더 편하더라고."

"난 아무 것도 안 써. 완전 딱딱하게 그냥, 안녕하세요. 누구누구입니다."


* 미국 웃음 = :) / 웃음웃음 = ^^


미국 웃음이든 웃음웃음이든 아무것도 쓰지 않든 저마다 백지 위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음은 분명해 보였다. 결국은 잘 해내고 싶은 마음에 이토록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쓰는 것일 텐데, 그 와중에도 우리는 일을 하며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거나 아예 그르치기도 한다. 그건 베테랑 작가도 마찬가지였는지, 책에서는 수정 요청을 받아들일 때의 경건한 마음가짐이라거나 사과문을 잘 쓰는 메일 노하우까지도 알려준다.


그러면서 비슷한 예시로 최강록 셰프가 주인공인 넷플릭스 '주관식당'의 강레오 편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해당 에피소드에서 최강록은 '영원한 천적' 강레오 셰프에게 정성스럽게 손질한 옥돔 구이를 선보인다. 최강록은 고도로 숙련된 기술을 사용해 가며 야심차게 요리를 내놓지만, 한 입 맛본 강레오는 특유의 날카로운 표정으로 최강록을 얼어붙게 한다. 찹쌀을 익히지 않은, 가장 기본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강레오는 최강록에게 다음에 더 잘하면 되죠, 다독이지만 최강록은 한 번만 더 해보겠다며 다시 처음부터 요리를 시작한다.


한참 동안 그 부분을 조용히 읽던 Y는 '이번 주 내가 딱 이랬다?'하고 입을 뗐다. 우리는 동시에 '헉' 소리를 내며 입을 작게 벌렸다. 엑셀로 수치를 보고하는데 결과값을 잘못 내서 처음부터 몇 번이고 계산을 다시 해야 했다고. 그런데 아무리 다시 해봐도 틀린 답만 나오더라는 것이다. 전날도 밤 9시까지 붙잡고 있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아서 오늘도 노트북을 가져오게 된 거라고. 어제는 퇴근길에 눈물이 찔끔 났다며 웃으며 말하는 Y였지만 공항에서 여권을 잃어버려도 헤실대던 그녀가 얼마나 좌절했을지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무한한 공감과 위로, 지지를 보내며 처진 어깨에 기운을 실어주었다.


대화가 마무리에 다다를 무렵, 우리 중 가장 감정 표현이 적고 냉소적인 편인 J가 문득 너네 이메주소 좀 알려줘, 던지듯 말했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에게 이메일을 쓰고 싶어졌다고 했다. 업무 요청, 보고, 안내, 민원 처리 목적이 아닌 사적인 마음이 들어 있는 이메일을. 나는 회사명이 적힌 메일 대신 초등학교 때 만든 유치한 이메일 주소를 적어주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꼭 보낼게. J는 다짐에 가까운 약속을 했다.




Y는 모임이 끝나자마자 다시 벌러덩 누웠다. 나 이런 시간이 정말 필요했어...! 누군가 듣지 못해도 상관없다는 듯 작은 볼륨으로 중얼댔다. 옆에 있던 내가 그 말을 용케 들어 너무 무리해서 시간 낸 거 아니야? 걱정스레 물었다. 그러자 꽤나 진지한(보기 드문 모습이다) 말투로, 오히려 지금과 같은 순간이 없었다면 어떻게 버텼을지 모른다고 내 물음을 거듭 부정했다. 진이 다 빠져버린 것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편안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한 Y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당장 그녀의 쉼 말고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책을 다 읽고 말고가 뭐가 중요하다는 말인가. 누우면 하늘이 보이고 나뭇잎이 살랑이고, 비둘기가...


악!


저마다 뒹굴대며 여유를 부리던 친구들이 비둘기 날갯짓 한 번에 소리를 빽하고 질렀다. 그러니까 비둘기가 이따금씩 놀래키긴해도, 이 모든 것이 낭만이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나른히 상념에 잠겨있을 때, H가 불현듯 가방에서 무언가 주섬주섬 꺼내더니 얇은 끈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정교하게 묶인 전통 매듭 아래로 각자의 학창 시절 사진이 우스꽝스럽게 코팅된, 세상에 하나뿐인 끈갈피였다. 우리는 또 한 번 서로의 과거를 비웃으며 박장대소했다. H는 순간을 남기고 싶었는지 슬며시 웃으며 동영상을 촬영했다. 그러니까 이런 비효율적 재능 낭비가 대체 낭만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냐고.


있잖아, 그런 게 있는 거 아닐까? 그 왜, 또라이 보존 법칙이라고 하잖아. 어떤 모임에서든, 무리에서든 또라이가 한 명은 있다고 하는 것처럼 완독 보존의 법칙이 있는 거야. 모임에서 누군가 책을 읽은 사람이 있으면 꼭 안 읽은 사람도 한 명 이상 생기는 거지. 넷 중 가장 말이 없는 편인 J가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중얼거리자 우리는 그거 제법 말 되는 소리라고 낄낄댔다.


5번의 독서 모임 동안, 비록 관념적이나 모임장의 역할을 맡고 있다 보니 과연 이 모임이 목적을 잃지 않고 잘 굴러가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운 순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날 끈갈피를 나눠주던 H와 메일 주소를 적어 가던 J, 그리고 뻔뻔스럽게 책의 첫 장을 펼치던 Y를 떠올리며 답을 내렸다. 이 대책 없는 여자들과 계속 실없이 웃을 수 있다면 잘 하고 못 하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겠다고. 선선한 바람과 호젓한 풍경 때문인지, 우리의 시간이 무한하지 않음을 불현듯 깨달아서인지 그 날은 어떤 무엇에도 충분히 너그러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문장을 쓰고 있는데 단톡방 알림이 울렸다. 다음 지정 도서를 선정하는 투표였다. 5월에는 어떤 책을 만나게 될지 모르겠지만 또 누구 한 명은 책 제목만을 인지한 채로, 그러나 발걸음은 가볍게 표정은 능청스럽게 설레설레 걸어오겠지. 어쩌면 다음엔 그게 나일 수도 있다. 설령 그렇더라도 아마 그녀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괜찮아, 몸만 와!



첫 책크닉, 제법 성공적...?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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