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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당마녀 Oct 04. 2022

눈물도 흐를시간이 있어야 흐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첫째 날은 슬퍼하는 것 말고는 크게 할 일이 없었지만 둘째 날부터는 조문객을 받아야 했다.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것은 조문객이 절을 할 때 내가 곡소리를 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마당에 그런 형식적인 것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이만큼 슬프다는 것을 조문객에게 알려야 나중에 뒷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매부들 말에 어쩔 수가 없었다. 

상주로써 자리를 지키고 누군지 모르는 먼 친척분들과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조문 온 직장동료들에게 감사함과 업무 인수인계를 마저 하고 조문 오신 분들에게 음식을 준비하고 식사하지 않는 조문객에는 음료수라도 드려야 마음이 편해서 작은 것이라도 챙겨 주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잘 먹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는 상주라서 같이 먹지는 못해도 아버지가 어떤 질병으로 돌아가셨는지 반복해서 설명하는 것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 음식이 부족한지 체크하고 미리 주문하고 결제 사인도 하고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것들이 많아 눈물을 흘릴 시간이 나지 않았다.

나를 잘 알고 나에게 늘 웃음을 주는 친구들이 찾아왔다. 친구들 얼굴을 보면 참고 있던 나의 슬픔이 터져 나올까 걱정했는데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나를 대하는 친구들 덕에 그나마 웃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임종을 보지 못해서 속상한 마음도 하소연하고 언젠가 미리 겪게 될 슬픔을 후회하지 말라며 조언도 하고 내일은 누가 아버지 관을 들어줄 건 지 확인도 하고 쓸데없는 지나간 추억 이야기도 하며 말이다.

그런데 막상 눈물이 터진 조문객은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냈던 사람들이었다. 어머니 친척분들이었다. 시골 외갓집에서 같이 어울려 식사도 하시고 좋아하셨던 술 한잔을 같이했던 아버지 모습이. 외할머니 팔순 잔치할 때도 당신의 어머니는 일찍 보내드리고 장모님을 엎어드릴 때 웃음 반 울음 반이었던 아버지 얼굴이.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3일 내내 자리를 지키지 못했던 나 대신 남아계셨던 아버지 굳은 등이. 아버지가 아프지 않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는 이모와 외삼촌들을 보니 참고 있었던 눈물이 눈치 없이 올라왔다. 들썩거리는 어깨를 참지 못하고 겨우 맞절을 끝내자 막내 이모가 말없이 내 눈물을 닦아주고 안아주는데 하마터면 소리 내어 엉엉 울 뻔했었다.


그렇게 썰물처럼 조문객이 빠져나가고 내 친구들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쯤 중년의 남성 한 분이 눈물을 쏟으며 들어왔다. 나의 조문객은 아닌 것 같아 매부들 눈치를 살폈지만 매부들도 모르는 눈치였다. 자연스레 어머니에게 신호를 보냈지만 어머니도 가물가물한 듯했다. 그 조문객은 조문을 마치고 본인은 아버지 고향 친구라고 소개했다. 자기 가족이 병원 입원 중이라 뒤늦게 내가 보낸 아버지 부고 문자를 보고 먼 거리를 운전해서 왔다고 했다. 늦게 와서 미안하다며 처음 보는 나에게 양해를 구했다.

“ 그래도 오랜만에 친구 얼굴 봐서 아버지가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

아버지 가시는 길에 외롭지 않을 것 같아 나도 몇 번이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보통 결혼은 결혼 당사자의 사회생활도 중요하겠지만 양가 부모님의 그동안 경조사를 참가했던 만큼 하객이 모이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부모님 경조사는 그 집 자녀, 특히 아들의 사회생활에 따라 조문객이 모인다고 한다. 내가 사회생활을 그렇게 잘했던 것이 아니라서 내심 같은 장례식장에서 비교가 될까 봐 또 아버지 가시는 길에 너무 조용할까 봐 걱정도 되긴 했었다. 

결혼식에 차마 부르지 못했지만 제일 먼저 조문 왔던 친구들, 마음을 먹어야 올 수 있는 거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달려와 준 친구들, 한동안 얼굴을 보지 못하고 전화나 카톡으로만 안부를 전했지만 오늘은 얼굴을 보여준 친구들, 덕분에 장례식 두 번째 날을 그나마 웃으며 버틸 수 있었다. 내가 오늘 당연하게 받았던 호의가 직장 생활하고 내 가정을 돌보다 보니 그것이 쉬운 일을 아님을 새삼 알게 된다. 관을 들어줄 친구를 알아보다가 취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신입일 때 돌아가신 친구 아버지 장례식장에 갔지만 회사 눈치 때문에 이틀 월차를 쓰지 못하고 관을 들어줄 생각도 못 했던 나 자신이 기억이 나서 장례식장에 왔던 그 친구에게 괜스레 미안해졌다. 그 친구가 느꼈을 감정을 이제야 이해되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가정을 꾸리고 나서는 더 많은 핑계가 생겼을 테니 그때가 그 친구가 부탁을 할 수도 있을 타이밍 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 얼굴 보기가 부끄러웠다. 그렇게 모든 조문객을 맞이하고 아버지를 보내고 이틀 밤 삼 남매가 다 모여서 정산을 했다. 아버지 돌아가신 마당에 정산이란 표현을 쓰기 싫었지만 사실 정산이라는 단어가 제일 적당한 표현이다. 장례식 비용뿐 아니라 생각보다 수목장 비용이 제법 나왔던 터라 각자 집에서 더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아버지 보는 앞에서 이러쿵저러쿵 목소리가 올라가는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어서 내심 걱정이 되었다.

아버지 돌아가신 마당에 다행이란 표현도 쓰고 싶지 않지만 다행히도 너무 일찍 아버지를 보낸 나에게 그리고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는 나의 배우자에게 많은 위로가 들어와 아버지를 잘 보낼 수 있었다. 물론 그 위로들은 내가 살면서 반드시 갚아야 하는 마음의 빚이지만 말이다.

아무리 큰 슬픔도 슬퍼할 시간이 있어야 눈물이 나온다. 눈물도 눈치가 있어 잘 참기도 하지만 눈치도 없이 불쑥 흐리기도 한다. 그리고 이제 도저히 눈물을 참을 수 없는 시간이 다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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