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바이러스가 우리의 일상을 파괴하고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사태를 겪고 보니,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이 떠올랐어요. 폭우가 내려 기우네 반지하집이 침수된 다음 날, 박사장 사모님은 아들의 번개 생일파티를 엽니다. 체육관 난민 신세가 된 기우네와 가든 파티를 여는 박사장네의 대비도 훌륭했지만, 아침에 전화를 돌렸는데도 몇 시간 만에 깔끔하게 차려입고 선물도 챙겨서 파티에 온 박사장네 지인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지요. 집이 물에 잠긴 기우네 가족이 갈 곳은 체육관 밖에 없었는데요.
이 모습을 내려다보며 기우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들 멋있다. 그지? 이렇게 금방 모였는데도 다들 쿨하고, 되게 자연스럽네. 다혜야? 나 잘 어울려?" 자기 가족과 박사장 가족은 종자부터 다르다는, 슬픈 깨달음이 들어있는 말이네요.
그런데 기우네 가족의 불행은 공정한 경쟁에서 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운명같은 것일까요? 수해를 당한 기우네 가족에게 피난처와 생필품을 제공했듯이 불우이웃은 국가가 나서서 도와주면 되고, 성공한 사람은 노력의 대가를 마음 편하게 누리면 그만일까요? 또 우리 사회는 자신이 내는 세금으로 실패한 사람들을 왜 지원하느냐고, 화를 내는 사람들이 왜 많을까요?
이런 상념에 빠져있던 중에, 엉뚱하게도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의 <어른 없는 사회> 중에서 '무임승차'에 관한 구절이 떠올라 다시 책을 폈습니다.
본래 가족이란 유아나 노인, 병자를 돌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약자에게도 구성원으로서 삶을 보장하는 것이 가족의 본래 책무입니다. 따라서 가족 내에서는 구성원들의 입장이 비대칭인 것이 당연합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벌 수 있는 사람은 더 많이 벌어서 가족을 부양하고 그럴 수 없는 사람은 무임승차를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유아는 '과거의 자신'이며, 노인은 '미래의 자신', 환자나 장애인은 '언제든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는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또 다른 모습'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207~208쪽)
우치다 선생님의 핵심적인 주장은 '원래 공동체는 약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약자 위주로 조직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것이 길게보면 공동체의 생존, 발전을 위해서 더 유리하다'는 것입니다. 교사 입장에서는 긴 안목에서 '무임승차'에 관한 기존 생각을 좀 뒤집어보면 어떨까요?
수업중 모둠활동이나 학급활동에 관한 아이들의 가장 불만은 무임승차하는 아이들입니다.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지만, 무임승차하는 아이들을 기생충과 똑같은 존재라고 여기는 아이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학교라는 조직을 서비스와 대가가 등가교환되는 계약 관계로 보지 않는다면, 관점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가파르게 성장해온 20세기와 다르게, 온갖 위험 요소가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는 21세기의 학교는 미래 세대를 '공동체 교육'을 통해 제대로 길러내어 미래 사회를 유지시키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는 원자화된 개인이나 가족이 서로 경쟁해서 승자가 자원을 독식해서는 유지될 수 없겠지요. 자원 자체가 줄어들고 있기도 하고, 이번 코로나19의 확산 사태처럼 국가가 나서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무엇보다 '강자가 약자를 돌보는 공동체적 삶의 방식'을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요? 가장 쉬운 접근방법은 모둠활동의 방식에 관한 성찰입니다.
겉으로는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급식을 먹지만 가정환경이나 개인의 능력 면에서 모두가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아이들도 알고 있겠지요. 그런데 모둠활동을 할 때면, 모두가 'n분의 1'의 역할을 평등하게 해야 하거나 자신이 맡은 역할을 각자 열심히 해서 다른 친구에게 최소한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하는 상황에 자주 놓입니다. 그래야 모둠점수를 잘 받을 수 있고, 전체가 감점을 당하지 않습니다.
무임승차 문제는 모둠에서 같은 결과물을 만들어서 같은 점수를 받을 때 흔히 일어납니다. 숟가락만 얹어도 같은 점수를 받는 아이 때문에 열심히 밥상을 차린 아이는 '늘 나만 봉이냐'하고 투털대고요. 그래서 모둠활동을 통해 같은 작품을 만들거나 발표를 하더라도, 평가는 개별적으로 하는 방식이 좋을 것 같아요. 교사가 관찰해서 점수를 매기면 되고, 아이들의 상호평가나 자기평가를 통해 보완할 수 있습니다. 수행평가도 그렇지만 교과서나 활동지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상적인 모둠활동에서도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모둠내 역할을 정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역할이 고정되면 겉으로는 평등하고 효율적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결과는 안 좋게 나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각자 내 할 일만 하면 되고,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니까요. 처음 한 두달은 어렵겠지만, 자연스럽게 묻고 답하면서 서로 '선을 넘고' 참견하며 의지하는 관계를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우치다 선생님은 집단적으로 미성숙하고 비지성적이고 이기적인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비대칭적인 인간 관계', '종적인 인간관계'를 되살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신선한(?) 주장을 합니다. 국가에서는 정부가, 학교에서는 교사가 조직적으로 약자를 돌보고 책임진다고 하면 할수록 시민과 학생 개개인에게 이웃과 친구를 돌볼 의무가 사라지고 약자를 돕는 것이 내가 할 일이 아닌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무임승차하는 친구에게 "같이 해보자, 도와줄까"라고 말하지 못하고, 교사에게 달려와 신고하는 아이들이 많나봐요.
아이들이 이렇게 생각하기로 마음 먹어버리면, 미래가 더욱 암울해질 것 같아요. 계약이나 규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려움을 겪는 친구의 사정을 이해하고 기분 나쁘지 않게 도와주는 관계 속에 희망이 있습니다. 더 잘 하고 많은 것을 가진 아이는 이미, 영화 <기생충>의 박사장 가족의 가든파티 장면이 잘 보여주고 있듯이 상부상조하는 네트워크가 충분하고, 교무실에 와서 선생님께 쉽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처럼 강자에게 의지하는 생존법도 익히고 있습니다. 이런 아이들에게 약자를 돕는 길이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를 돕는 길이라는 진실도 알려주고 싶습니다. 그러다 보면, 도움을 받는 쪽의 아이들도 네트워크가 생기고 소속감도 생기면서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겠지요.
가족과 이웃을 지원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는 사회계약에 적혀 있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의무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더 많은 부담을 떠안습니다. 도로에 떨어져 있는 빈 깡통을 줍는 것과 같습니다. 내 일이 아니니 그대로 방치한다 해도 누구도 비난할 수 없지만 그 깡통을 줍는 것이 내 일이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도로는 깨끗해집니다. '공동체 구성원은 모두 대등하며, 같은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에서는 이런 행동이 나오지 않습니다. 자신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의무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만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더 많은 일을 기꺼이 떠안습니다. (201쪽)
간단한 모둠활동이나 사소한 학급활동 하나를 할 때도, 교사가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좀더 고민해봤으면 좋겠습니다. 그것 역시 우치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기꺼이 떠안는 것'이 되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