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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행복해질 용기가 필요한 때

- <미움받을 용기2> 두 번째 이야기

by 글쓰는 민수샘

<미움받을 용기2>를 다시 읽은 지, 1주일이 넘었지만 계속 머릿속에 맴돌다 가슴 언저리를 찌릿하게 만드는 말이 있습니다.


"자네가 내린 결론이 아이들의 인격을 무시하고 있으니까."


책 속의 철학자가 교사가 된 청년에게 '아이들의 인격을 무시하고 있다'라는 단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학교에서 문제아를 지도하면서 한계를 느낀 청년은 '인격 형성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서의 교육'은 가정에 책임이 있다고 말하면서 교사들의 역할은 '좁은 의미에서의 교육, 즉 교과차원의 교육'에 불과하다고 결론을 내지요. 저 역시 '흡연이든 수업태도든 부모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아이를 교사가 어떻게 변화시키겠는가'라고 생각한 적이 많습니다. 저는 어느새 청년편이 되어서, 철학자가 분명 궁색한 대답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 문제행동은 누구를 향한 것일까? 물론 '자네'겠지. 그 학생이 '자네에게 보이는 얼굴'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을 때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네'를 향해서 그 문제행동을 계속하는 거라네. 부모의 문제가 아닐세. 오로지 자네와 학생 사이에서 일어난 문제지. … 어쨌든 그 아이들은 지금 자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선생님의 수업을 방해하자'라든가, '이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무시하자'라고 결심한 상태라네. … 이는 자네를 향한 행동이니 자네가 먼저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돼. … 그 아이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으니까."


가정에서 문제가 있는 아이가 학교에 와서 교사나 친구들에게 대신 화풀이를 하거나 관심을 끌기 위해 지나치게 의존한다면, 특히 그 아이를 매일 봐야 하는 담임교사는 '그 아이 때문에 매일매일이 불행하다'라고 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담임교사가 힘든 것이지요.


그런데 <미움받을 용기2>에서 아들러는 그런 힘든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들에게 매일매일 '행복해질 용기'를 가지라고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방법은 명확합니다. 학교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아이를 먼저 신뢰하고 존중하라고 합니다. 직장에서는 동료나 고객을, 가정에서는 배우자나 자녀에게 그렇게 하고요.


흔하디흔한 행복지침서나 자기계발서의 뻔한 말 같지만, 아들러 심리학은 '타인을 사랑할 용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내 마음만 바꾸면 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누구이든 권위를 내려놓고 친구가 되라고 합니다. 교사라면 학생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경청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함께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선생님은 네가 말한 대로 그렇게 변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어"라고 말해주는 것이지요.


그런 관계가 가능할지, 그런다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변할지 모르겠지만 희망은 있습니다. 다큐멘터리에서 본 북유럽 사람들은 부와 지위, 권력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친구처럼 지내더군요. 교장과 교사, 교사와 학생이 친구처럼 장난치고, 문제가 생기면 언제라도 무릎을 맞대고 대화를 나눕니다. 국회의원과 시민이, 기업 임원과 노동자가 친구처럼 지내면서 서로 존중하고 상대방의 말을 경청합니다.


사회 변화를 떠나 개인 차원에서도, '나쁜 그 사람, 불쌍한 나'라는 카테고리를 맴돌며 계속 불행해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길이겠지요.그래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한 것 같습니다.더 행복해지기 위해 아이들을 신뢰하고 존중하고 싶습니다.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고 변화 가능성을 신뢰하는 나의 마음이 진심이라면,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든 '나는 최선을 다해 그 사람과 친구가 되려고 한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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