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사의 2월 이야기 (4)
2월말은 3월부터 가르칠 과목의 평가계획에 대한 구상으로 한참 머리가 아프고 검색하느라 눈도 아플 때이지요. 수행평가 방법, 적당한 교재와 도구 등을 고민하고 주위에 묻고 하느라 바쁘지요. 그리고 첫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전달할 내용도 준비하고, 교사 자신을 어떻게 인상적으로 소개할까, 올해의 컨셉은 어떻게 잡을까, 까칠하게 아니면 상냥하게 시작할까 결정도 해야합니다. 이처럼 교과의 목표와 내용, 평가방법과 함께 교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과 수업규칙을 아이들에게 설명하고 당장 실행해야 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2월 마지막주가 한 해 수업농사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놓치기 쉬운 것이 수업 속에서 학생과 학생의 관계를 어떻게 디자인할까 하는 생각입니다. 저 역시 아이들에게 선생님은 모둠활동을 많이 한다고 하면서 경청, 협력, 존중, 배려의 태도를 강조하고 주제, 탐구, 표현의 수업을 위해 열심히 참여하고 발표할 것을 부탁했지요. 그리고 우선 '선생님과 동시에 말하지 않기'만 잘 지키면 즐거운 수업이 될 수 있을거라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벽트기나 얼음깨기 활동으로 이것저것을 많이 시도하면서 즐겁게 수업 첫 시간을 보냈습니다.
문제는 막상 진도를 나가기 위해 교과서를 펴거나 활동지를 나눠주면서 발생하지요. 참여와 소통, 배려와 존중, 미래역량 등으로 무장한 교사의 감동적인 훈화(?)와 서로 소개하고 친해지는 모둠세우기 활동, 게다가 모둠활동 참여나 발표를 수행평가 점수나 교과세특에 반영하겠다는 선포가 아이들의 표정을 부드럽게 하고 모둠 내에서 말문을 열고 활동에 몰입시키면 좋으련만, 현실은 교사의 바람과는 반대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반은 묵비권을 행사하며 침묵시위를 하고, 어떤 반은 방방 뜨는 몇몇 아이들 때문에 교사의 표정이 일그러짐과 동시에 목소리가 높아지지요. 또 어떤 반은 모둠마다 극과 극인 분위기와 수준 차이 때문에 당황스럽습니다. 모둠활동의 이상은 참 좋지만 현실은 참 냉혹합니다.
저는 이런 고민에 대한 실마리를 사토 마나부 교수님의 '배움이 성립하는 요건'에서 찾았습니다. 교과의 본질을 추구하는 수업, 협력적 관계에 바탕을 둔 모둠활동, 점프가 있는 수준 높은 과제가 그것입니다.
가. 교과의 본질에 입각한 진정한 배움
모든 교사는 수업을 디자인하기 전에 스스로가 답해야 하는 질문이 있다. 그것은 ‘아이들이 이 교과의 가치를 제대로 체화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이다. 예를 들면, 문학의 배움은 텍스트와의 대화가 중요하여 친구와의 대화(이야기)에 앞서 텍스트와의 대화(텍스트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과학의 배움은 관찰과 실험에 기초한 모델의 구성으로써 탐구 과정이 배움에 조직되어야 한다.
나. 서로 배우는 관계, 협력적 배움
아는 것을 ‘서로 이야기 하는 관계’가 아니라, 먼저 모르는 것을 ‘서로 듣는 관계’ 만들기, 공연히 참견하는 ‘서로 가르치는 관계’에서 티 안 나게 배려하는 ‘서로 배우는 관계’ 만들기를 지향한다. 또한 누구나 안심하고 배움에 몰입할 수 있는 교실,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한 명도 빠짐없이 존중받는 교실은 서로 듣는 관계로 배울 준비가 갖춰진다.
다. 수준 높은 점프가 있는 배움
배움은 타인이나 도구의 도움에 의한 ‘발돋음과 점프’이며 가능한 한 높은 수준의 과제에 도전할 필요가 있다. 기초 수준을 반복하는 작업에서, 기초를 발판으로 수준 높은 과제에 도전하는 활동으로 수업을 디자인한다.
학년 초이니까 어색해서 모둠활동이 잘 안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고 쉽고 단순하고 흥미를 자극하는 내용만으로 수업을 디자인하고, 교사가 친절하게 모둠내 역할을 정해주면서 해야할 것과 하지말아야 할 것을 일러주면 오히려 모둠활동이 갈수록 어려워졌던 경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교과의 본질에 맞게 감상이나 탐구할 시간을 충분히 주고, 모둠내에서 자연스럽게 과제 해결 방법을 찾아서 역할 분담을 하도록 권유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모둠만 지원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필요하다면 사회자 정도만 정해주고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혼자서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를 모둠활동으로 던져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생소하고 해결 방법이 금방 떠오르지 않고 교재를 여러 번 보거나 질문해야 하는 활동이 학년 초에 더욱 필요한 것 같습니다.
얼굴엔 미소를 잃지 않되, "모둠에서 충분히 논의하고 협력하면 해결할 수 있어요"라는 멘트를 날리며 불친절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서서히 모둠내에서 '이거 어떻게 하는거야?', '너는 알겠니?'라는 대화가 시작됩니다. 한 모둠에서 시작된 대화는 잔잔한 파도처럼 다른 모둠으로 퍼져갑니다. 학년 초에는 기본적으로 아이들이 점잖은 척하니까, 한 모둠의 대화가 다른 모둠까지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한 학급에 절반 정도의 모둠만이라도 그 시간의 수업 주제로 대화를 시작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모둠이 포기하고 잡담하더라도 전체 공유 시간에 배움이 일어난 모둠의 이야기를 다함께 듣고 되돌리기를 하는 것만큼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 교사의 마지막 자존심이 아닐까요? 이 과정에서 '이거 너무 어려워, 뭘 하라는 거야'라는 아이들의 혼잣말이나 불평을 교사는 그냥 지나치면 안 되겠지요. '어디가 어려운지, 무엇때문에 못하겠는지'를 말하기 시작하면 배움으로 들어가는 첫 문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열게 되는 것이지요.
아래에 제가 만든 활동지 중에서 주제와 만나는 1차시 사례를 공유합니다. 교과서의 도입 부분은 너무 뻔하고 쉽거나 교사도 재미 없는 학문적 접근이라서 동기부여가 아니라 '동기부정'이 되는 사태가 많이 일어나더군요. 그래서 모둠에서 만나서 앞으로 배울 주제에 대해 서로의 경험과 지식을 모자이크처럼 나누며 도전할 수 있도록 새로운 단원의 1차시이지만 점프과제를 넣었습니다. 교과의 본질에 맞게 문법은 문자나 언어 현상을 탐구하고, 문학은 작품을 여러 번 깊이 있게 읽고 감상을 나누거나 내용을 분석할 수 있는 질문을 먼저 던지고, 점프 과제로 정답이 하나가 아니거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발상과 표현이 가능한 질문을 제시하는 것이지요. 때로는 역발상으로 단원별로 학습활동 마지막에 제시되어 있는 <도전(심화) 활동>이나 <더 알아(읽어) 보기>를 1차시의 첫 모둠활동 과제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한 계단씩 밟으며 올라가는 배움은 주위를 돌아보며 도움을 요청할 필요가 없겠지만, 등산로 초입에서 만나는 커다란 바위는 아드레날린를 분비해서 몰입하게 만들면서도 겸허한 태도와 도움을 요청하는 태도를 갖게 합니다.
한 시간 내내 기초적인 내용만 반복할 경우 서로 질문할 내용이 없거나 단순한 내용을 반복하기 때문에 모둠활동의 긴장감이 떨어지고, 반대로 과제가 너무 어려운데 대상을 충분히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없거나 모둠에서 서로 물어보고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교사의 도움을 요청하는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누구나 쉽게 포기하겠지요.
처음에는 답답하고 실패도 많이 하고 진도 나갈 걱정도 되겠지만, 모둠에서 배움이 일어나는 관계를 만들기 위한 수업 디자인에 도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 역시 올해도 수 많은 당황스러운 상황과 인내의 순간이 예상되지만, 새로운 아이들을 만날 기대와 예측할 수 없는 점프과제 해결 모습을 상상하며 심장박동수가 점점 빨라지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