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파친코>, 또하나의 인생 드라마입니다.
아이폰, 아이팟 한 번 써본 적 없는 제가, 애플이 준 깜짝 선물을 이렇게 받을 줄은 몰랐네요. 애플TV가 '식민지 조선'을 소재로 한 소설을 감동적인 드라마로 만들어서 전 세계의 가정에 배급한다는 것은 아이러니이지만, 기술의 발전이 가져다준 큰 축복이기도 합니다. 재미교포인 이민진 작가가, 일본과 미국의 혼혈인 남편을 만나 일본에서 잠깐 살게 되면서 '재일교포'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어 탄생하게 된 스토리도 극적입니다.
<파친코> 1~4부를 보면서, 이제 80대가 되신 어머니가 자꾸 안쓰럽고 제가 고등학교 때 돌아가신 외할머니, 친할머니의 환한 얼굴이 계속 떠올라서 슬펐습니다. 일제 강점기라는 시련의 역사를 잘 안다고, 그 역사의 진정한 의미와 그 시대를 살아낸 우리 선조들의 삶에 진정으로 공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식민지의 여성으로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농사일을 거들면서 밥하고 빨래하고, 자식을 낳아 길러서 시집, 장가보냈던 우리 증조, 고조할머니들의 삶은 '눈물' 그 자체였습니다. 윤여정 배우가 연기한 주인공 선자는 하나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삶의 굴레를 몇 개나 더 짊어지고도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는 '우아한' 조선 여성의 자태를 보여줍니다.
글자도 깨우치지 못한 식민지의 가난한 시골 여성, 장애를 가진 아버지를 둔 미혼모인 선자는 도대체 몇 등 국민쯤 될까요? 일본 순사에게는 10등 국민쯤 될까요? 헤아리기도 어렵습니다. 게다가 4월 8일 공개 예정인 5화부터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조센징'으로 불리며 온갖 수고를 겪을 것이라서, 눈물과 한숨을 미리 저장해놓고 플레이를 눌러야 할 것 같습니다. 격한 갈등과 자극적인 장면이 거의 없는 드라마라, 오히려 잔잔한 슬픔이 더 출렁일 것 같습니다.
약간의 스포가 있을 수 있지만, 1~4화에서 가장 뭉클했던 장면을 소개할까 합니다. 바로 '흰쌀밥'에 관한 에피소드인데요. 1989년 시점에서 할머니 선자는 다른 재일교포 할머니가 해준 밥을 한 입 먹고는 바로 일본 쌀이 아닌 것을 알아챕니다. 그 맛을 구별 못하는 손자에게 이렇게 말하지요.
"이거 우리나라에서 키운 쌀이다. 더 꼬숩다 아니가. 묵어보면 더 달달하고 찰지다 아니가. 그 시절엔 이런 하얀 쌀밥을 구경도 몬한다."
'우리나라에서 키운 흰쌀밥'을 매일 먹으면서도 생각 없이 남기고, 미련 없이 버렸던 저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선자가 고향에 있었을 때, 딱 한 번 '하얀 쌀밥'의 맛을 제대로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남편을 따라 일본으로 떠나기 전날 밤에 어머니가 해준 쌀밥 한 그릇의 맛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지요.
젊은 시절 선자 역할을 맡은 김민하 배우도 대단했지만, 어머니 역할의 정인지 배우의 연기는 정말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감탄사가 나왔고 홀린 듯이 어머니의 애끓는 마음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시집가는 딸을 위해 미곡상을 찾아가서 일본인에게만 허락하는 흰쌀을 두 홉만 팔아달라고 눈물을 글썽이며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은 눈물 없이 볼 수 없었습니다. ㅠ.ㅠ
그렇게 구해온 쌀을, 정말 갓난아이 다루듯 꺼내서 씻고 가마솥에 안치고 불을 때고 뜸을 드리며 밥을 짓는 어머니의 모습은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었습니다. 배우의 표정은 물론, 음악과 카메라의 구도, 편집까지 최고였습니다.
그렇게 눈물을 지은 두 그릇의 흰쌀밥을 들고 굳은 얼굴로 들어온 어머니는 말없이 사위와 딸 앞에 놓아줍니다. 들키지 않으려고 딸의 얼굴을 흘깃 훔쳐보고 나가는 어머니의 모습은 가장 한국적이어서, 가장 세계적인 명장면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오징어 게임>이 가지 못한, 또 다른 위대한 여정을 드라마 <파친코>가 보여줄 것 같아 기대가 큽니다. 벌써 많은 나라에서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고 하네요. 우리 민족의 있는 그대로의 수난사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새로운 깨우침을 주고, 조선인 특히 여성의 강한 생명력과 사랑의 힘을 다른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보고 느끼면서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리라 확신합니다.
그 바탕에 원작 소설이 갖는 힘과 매력이 있어서, 문학 시간에 아이들에게도 추천해야겠습니다. 이민진 작가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