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나희덕 시인의 시와 수필을 여러 편 가르쳤습니다. 다른 원고를 쓸 일이 있어서, 시인의 인터뷰를 검색해서 읽어봤는데 정말 인간적으로 반했어요. ^^
특히 <종이감옥>이란 작품이 2017년에 작가들이 뽑은 '오늘의 시'로 선정되어 했던 인터뷰가 좋았습니다. 지금도 세상이 어수선하고 어지럽지만 그때도 국내 정치로 혼란스러웠지요. 시인으로서의 사회적인 발언과 행보를 꾸준히 이어나가고 있는 이유에 대한 답변의 여운이 오랫동안 남았습니다.
랑시에르는 ‘정치’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는데,‘ 정치’라는 말 대신 ‘시’를 넣어도 그대로 들어맞는 것 같아요. 시야말로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소리들을 듣게 하는 역할을 해왔지요. 눈에 보이는 현실을 증언하는 것을 넘어서 ‘몫 없는 자’와 ‘목소리 없는 자’들을 대신해 말해야 한다는 점에서 시와 정치의 역할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요. 불행하게도 시와 정치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지요.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고통 받는 자로서 다가가 옆에서 기척을 내고 목소리라도 들려주는 것, 그것이 최소한의 도리다, 이렇게 생각해요.
저는 자크 랑시에르가 말했던 '정치' 자리에 '수업'을 넣어봤어요. 그랬더니 금방 겸손해지더군요... 20년 넘게 교실에서 했던 수업이 얼마나 아이들에게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눈, 들리지 않던 것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었는가 한참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름 노력해 온 세월이었지만, '뻔한 이야기'도 많이 했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구나 쉽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는 어른 중의 한 명으로 아이들 앞에서 떠들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실력, 직업, 인성, 성실함 그런 것들은 굳이 제가 말을 보태지 않아도, 열심히 아이들을 유혹하고 있는 것들인데요.
그래도 나희덕 시인의 <종이감옥>을 읽으면서 위안을 얻기도 했습니다. 올해는 수업을 하지 않지만, 내년에 학교로 돌아가면 내가 생각해도 뻔한 이야기는 되도록 안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지금 공부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한다' 같은 꼰대 같은 말보다, '지금 무엇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까?'라는 질문을 아이들에게 던지고 싶습니다. 혹은 '지금 있는 그대로 나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해라'라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반복하는 메시지보다, '그런 메시지 뒤에 숨어서 웃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라는 것을 탐구해 보는 시간도 갖고 싶습니다.
이런 저의 자아성찰이 다시 뻔한 습관처럼 느껴질 때, 나희덕 시인의 <종이감옥>을 자주 꺼내 읽어야겠습니다. 나희덕 시인이 대학의 작은 연구실에 갇혀서 느꼈던 위태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저부터 세상이 쏘아대는 눈부신 조명과 달콤한 음악을 의심하는 눈과 귀를 가져야겠습니다.
베스트셀러가 아닌 책을 읽고, 인기 없는 영화를 보고, 관광객이 없는 곳으로 여행을 가고 싶습니다. 그런 눈과 귀가 있어야 모든 아이를 한 방향으로 몰아서 똑같이 생긴 우리 속에 집어넣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깐 여기, 누구나 불을 끄고 켤 수 있는 이 방에서, 언제든 문을 잠그고 나갈 수 있는 이 방에서, 그토록 오래 웅크리고 있었다니
묽어가는 피를 잉크로 충전하면서
책으로 가득 찬 벽들과
아슬아슬하게 쌓아놓은 서류 더미들 속에서
이 책에서 저 책으로 이 의자에서 저 의자로 옮겨 다니며
종이 부스러기나 삼키며 살아왔다니
이 감옥은 안전하고 자유로워
방문객들은 감옥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지
간수조차 사라져버렸지 나를 유폐한 사실도 잊은 채
여기서 시는 점점 상형문자에 가까워져 간다
입안에는 말 대신 흙이 버석거리고
종이에 박힌 활자들처럼
아무래도 제 발로 걸어 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썩어문드러지든지 말라비틀어지든지
벽돌집이 순식간에 벽돌무덤이 되는 것처럼
종이벽이 무너져내리고
어느 날 잔해 속에서 발굴될 얼굴 하나
종이에서 시가 싹트길 기다리지 마라
그러니깐 오늘, 이 낡은 방에서, 하루에 30분 남짓 해가 들어오는 이 방에서, 위태롭게 깜박거리는 것이 형광등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다니
인터뷰 출처 : 쿨투라(http://www.cultura.co.kr)
http://www.cultur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