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평가 국어 영역 문제지를 열면 낯선 시를 만나는 설렘과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다. 아이들에게 이 말을 하면, "선생님, 제발요." 하면서 손사래를 치겠지만, 교사든 학생이든 수능에 시의 전문이 출제된다는 것은 슬픈 기쁨이다. 어떻게든 시를 읽고 가르칠 수 있으니까...
올해 7월 고3 문제지에서도 정희성의 시 <길>을 만났다. 요즘의 10대에겐 감흥이 없겠지만, 나의 이야기를 대신 말해주고 있는 느낌이 든 시라서 반가웠다.
시에 등장하는 화자의 부모님과는 다르게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돈을 잘 버는 것을 바라지 않으셨다. 평온하게 안정적으로 사는 것을 원하셨다. 대학에 가서 교사가 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취업을 선택했던 어머니는 국문학과에 진학한 내가 교직을 이수하길 바라셨다. 그런 바람에는 관심이 1도 없었던 당시의 나는 대학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다른 것만 열심히 하다 비싼 등록금을 한 학기 더 내고 나서야 대학을 졸업했다.
그 후 언론 고시를 준비한다고 설치다가 어학연수까지 다녀와서 백수가 되었고, 뒤늦게 교육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에 가서야 학원 강사를 해서 부모님께 봉투를 처음 드렸고, 대학 9학기를 다니면서 한 번도 받지 못한 장학금을 대학원에서 처음 받았다. 식당 일을 마치고 밤늦게 돌아온 부모님께 장학금 통지서를 보여드렸을 때, 아버지는 제육볶음에 소주 한잔해야겠다며 웃으셨고 금세 눈망울이 빨개진 어머니는 부엌으로 가며 '오! 주님'을 조용히 읊조리셨다.
이렇게 시를 읽으면 함축된 의미가 주는 여운이 있어 상상의 날개를 펴게 된다. 시의 한 구절이 훅하고 마음을 잡아당겨서 잠시 추억에 적게 하거나 주변을 새로운 눈으로 돌아보게 하고, 때론 성찰의 길로 들어서게 한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시라도 문제지에서, 그것도 수능이나 학력 평가 문제로 만나게 되면 다 똑같은 작품이 되고 만다. 시인과 제목의 고유성은 사라지고, (가)와 (나)로 불리면서 시의 형식적 특징과 시어의 의미를 비교당하게 된다. 가장 불행하고 슬픈 것은 3점짜리 문제의 <보기> 속에 담겨있는 시의 주제이다. '<보기>를 바탕으로'가 아니라, 독자의 경험과 감성으로 먼저 느끼고 다른 사람과 감상을 나누어야 하는데, 그런 길이 아예 막혀있다.
정희성의 <길> 역시 신의 계시처럼 주제가 주어져 있다. '세속적 가치를 따르지 않고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를 추구하는 화자의 의지'가 주제 의식으로, '양심을 지키기 어려운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화자의 태도로 절댓값이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시어와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는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보기>가 있어서 주체적인 시 감상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문제지에서 좋은 시를 ㅁ할 때마다 우울해진다.
정희성의 <길>을 읽고, 시의 화자를 분석하고 구절의 의미를 파헤치기 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시의 형식과 내용을 근거로 자기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문학 수업이 될 수 있다.
많은 국어 교사와 강사들이 작품을 읽기 전에 <보기>를 먼저 보라고 가르치고 있다. 선생님의 잘못도, 학생의 잘못도 아니다. '그럼 누구의 잘못인가?'라는 질문을 더이상 던지지 않는 것, '이것은 분명한 잘못이다'라고 짐작할 뿐이다. 수능이 5지선다라서 문학 시험도 5지선다로 낸다는 말을 더이상 할 수 없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10년 남짓 남은 교사 생활이 끝나기 전에 그런 날을 맞이하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