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92년 10월 12일 입대했다. MBC 라디오 <정은임의 FM 영화 음악>은 같은 해 11월 2일에 처음 방송되었다. 내가 논산 훈련소에서 '단거, 단거!'를 외치며 원시 인류가 되어갈 때, 정은임 아나운서는 중독성 강해서 매우 '댄저러스'한 목소리로 청춘의 마음을 흔들었다.
제대할 때까지 나에게 밤 1시~2시는 가장 견디기 힘든 야간 경계근무 시간이었지만, 철책 밖에 있는 누군가에게는 깊이 있는 영화 이야기와 음악을 만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같은 날, 정반대의 공간에서 흐르던 시간이 30년을 뛰어넘어 만나게 될 줄이야. 사람은 가도 목소리는 남아서 온 우주를 날아다니다가 내 귀에 우연히 착륙하게 된 것일까?
정은임 아나운서는 35세였던 2004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카세트테이프에 모든 방송을 녹음해서 보관해 오던 그녀의 아버지 덕분에 군대에서 듣지 못했던 방송을 30년 만에 듣고 있다. 팟캐스트와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정은임의 FM 영화 음악>을 핸드폰으로 어디서든 쉽게 들을 수 있게 되었으니, 자존심 상하지만 "세상이 참 좋아졌네"라는 말을 참을 수 없다.
1992년 11월 8일 방송에서는 정성일 영화 평론가가 처음으로 출연하여, <베를린 천사의 시>를 소개했다. 그런데 '스포'라는 말이 없던 시절이라 그런지 줄거리를 거침없이 소개하길래, 얼른 방송을 끄고 집에 와서 영화를 먼저 봤다. 역시나 세상이 좋아져서 유튜브에서 30분 요약본을 봤는데, 그래도 재미있었고 울림이 컸다. 영화를 다(?) 보고, 라디오 방송을 이어 들으니 나도 '씨네필'이 된 것처럼 우쭐해졌다. 정성일 평론가의 해설과 정은임 아나운서의 감상평이 더해져서 더욱 좋았다.
20대 시절 아마도 비디오 대여점에서 난해한 제목 때문에 지나쳤을 영화인데, 나이를 먹고 나니 <베를린 천사의 시>란 한국어 제목이 참 마음에 들었다. 독일어 원제는 '베를린 위의 천국'이라는데, 미국에서는 '욕망의 날개'로 참 저렴하게 바뀌어 개봉되었다고 한다. (국내에도 '욕망의 날개'로 제목을 달았다면, 아마 20대의 나는 비디오테이프를 집어들었을 수도...)
한국어 제목에 '시'가 들어가게 된 것은, 영화 전편에 흐르는 페터 한트케(Peter Handke)의 시 '유년의 노래' 때문이다. 영화만큼 시도 좋았다. 언젠가 이 영화를 다른 사람과 함께 보고 시를 낭송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내 모습도 상상이 된다.
이렇게 가끔은 남들이 모르고 관심 없는, 비주류 문화생활에 빠지는 즐거움도 괜찮은 것 같다. 이제는 들을 수 없어서 더 애틋한 사람의 목소리와 함께하는 신묘한 문화 생활이다.